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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Feb 07. 2018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남성신파 -<영웅본색>

영화 <영웅본색> 리뷰

바바리코트, 입에 문 성냥, 끝없이 발사되는 총알, 의리… 한때 모든 남자들의 열광의 대상이었던 이 영화는 지금은 낡은 영화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왜 이 시대에 케케묵은(혹은 케케묵었다고 평가되는) 이 영화에 대해 다루느냐고 묻는다면 ‘걸작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케케묵은 말로 대답을 하고 싶다.

  
지나치게 의리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위해 목숨을 쉽게 바치는 인물상과 조금은 과한 액션(탄알 수를 고려하지 않고 발사되는 총격씬)은 오우삼 영화에서 제기되는 고질적인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남성 신파의 끝을 달리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액션도 적다. 사실 사람들이 비판하는 부분들은 대부분 계획되지 않고 만들어진 이 영화의 속편에서 나오는 요소들이다.


다시 이 영화를 찾았을 때, 상영시간에 새삼 놀랐다. 두 시간은 거뜬히 넘을 거라고 기억했는데 90분 남짓한 러닝타임이었다. 영화는 겨우 90분 안에 배신과 복수, 그리고 관계의 회복이라는 깊은 서사를 다 풀어낸다. 복잡한 인물관계와 그 해결을 단시간에 풀어내는 감독의 연출 솜씨와 배우들의 명연기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홍콩에 간다면 꼭 홍콩의 야경을 보며 마크의 대사를 읊을 것이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영화의 주제는 단순히 의리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물론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졌다’라고 하는 유명한 문구처럼 남자들 간의 눈물겨운 우정이 나오고 배신자에 대한 응징이 뒤따르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자신이 믿는 신념’에 대한 영화다. 그 신념 안에 의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뿐이다.


영화의 본래 주인공은 송자호와 그의 동생 아걸이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기억에 남는 건 단연 조연인 마크다. 인상 깊은 장면, 멋있는 장면을 대부분 그의 몫으로 몰아준 탓도 있지만 마크야말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프닝에서 위조지폐를 태우며 담배를 피우는 마크의 모습이 그의 삶에 대한 태도를 대변한다. 그에게 돈은 별로 중요치 않다. 마크가 추구하는 것은 태우면 사라지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가치다. 그는 언제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담배를 피우는 모습, 요짐보의 사무라이를 오마주한 것처럼 성냥을 물고 다니는 모습 등 주윤발을 상징하는 장면들은 극 중 초반에만 나올 뿐 대부분의 러닝타임 동안 그는 후줄근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마크가 진정으로 의미를 발휘하는 것은 건들거리던 그 겉모습보다는 그의 내면이다. 그는 송자호의 복수를 하다가 다리를 다쳐 몰락하지만 그가 있던 세계를 떠나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한다. 그에겐 그만의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송자호와 아걸은 영화 내내 운명의 장난에 휘둘리는 존재인 반면에 마크는 온전히 자신의 뜻대로 행동한다.

송자호 : 넌 신의 존재를 믿어?
마크 : 믿어. 내가 신이거든. 신도 인간이야.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신이지.   


마크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며 하는 그의 대사처럼 화려한 시절에는 그것이 아름다운 줄 몰랐지만 몰락한 후에서야 그걸 느끼게 된다.


마크 : 홍콩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 하지만 오래 못 가니 아까워.

마크는 홍콩의 야경 같은 존재다. 한순간에 빛을 발하고 사라지지만 그 빛나는 순간이 너무 아름답기에 오래도록 기억될 수밖에 없는 존재.

마크 : 나도 나만의 원칙이 있어. 평생을 짓밟히며 살긴 싫어! 구걸하는 게 누군 좋은 줄 알아? 지난 3년 동안 기회를 기다렸어. 다른 사람에게 날 과시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잃은 걸 돌려받고야 마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고 싶어!


그렇기에 마크는 홍콩을 떠날 수가 없다. 아니, 떠나면 안 된다. 그건 영화 속 그가 홍콩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여기서 홍콩 반환에 대한 불안감 얘기는 잠깐 배제하도록 하자) 그의 목표가 돈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가치, 의리와 우정을 회복하고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그는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끝내 형제의 우애를 회복해준 채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마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송자호 : 아걸, 넌 잘못한 게 없다. 서로 길이 달랐던 거야. 네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이지. 난 잘못된 길을 걸어왔어. 이젠 바른길로 돌아가고 싶어. 너무 늦지 않았길 바래.


결국 마크는 죽고, 손을 씻겠다는 송자호의 손은 다시 피로 더럽혀진다. 그리고 아걸마저 신념을 져버리고 범죄자를 체포하는 대신 죽여버리고 만다. 아성이 죽어도 새로운 범죄조직은 계속 생겨날 것이지만 송자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싶어 한다. 아걸이 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체포되는 길을 택하고 기가 막힌 타이밍에 메인테마가 흐른다. 나로서는 이 장렬한 신파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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