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태엽 Feb 07. 2018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이마무라 쇼헤이) 리뷰

끝내 모든 것의 근원인 아버지에게는 복수를 하지 못하는 시대의 자화상

“젠장. 죽이고 싶다. 당신을...”


 <복수는 나의 것>이라니. 제목부터 거창하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이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은 겉보기로는 전혀 복수와는 상관없어 보인다. 형식으로만 보면 한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행적을 쫓는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볼 때, 이 영화에서 말하는 그 ‘복수’의 대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스산한 겨울, 장어처럼 꼬인 도로를 따라 경찰차들이 지나가고 범인으로 보이는 한 인물이 노래를 불러댄다. ‘나를 데려가 주오. 천국의 문으로...’ 연쇄살인범 에노키즈는 자신이 잡혀가고 죽을 운명인 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전혀 신경 안 쓰는 것 같다. 그는 옆에 있는 형사에게 말을 건다. 


-형사는 몇 살이오?
-쉰다섯이다
-난 사형이겠지? 한 3년 뒤에 목매달린다 치면 난 40살이겠군. 어쨌든 난 당신과 같은 나이까지 살 수 없다 이거지. 나보다 10년 이상 쓸데없이 더 살고도 또 부질없이 살 수 있겠군. 불공평하다니깐 세상이란.
-사람을 4명이고 5명이고 죽여놓고 그게 할 말이야?
-난 사라지겠지, 그쪽은 살아갈 테고. 하지만 당신도 죽어.
 
이런 말을 내뱉으며 그가 신경 쓰는 것이라고는 한겨울에 유치장이 추운 지의 여부다. 이 남자, '에노키즈'에겐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취조 과정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사회의 병폐 같은 에노키즈가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에 대해 조금씩 다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영화는 살인자의 근원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그저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과정을 건조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나 변명을 대지 않고 그저 제도 속에서 날뛰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그나마 에노키즈가 이렇게 된 사연을 암시하는 부분은 그의 어린 시절인데 이마저도 영화에서는 아주 짧게 다뤄진다. 에노키즈는 2차대전 당시 아버지가 배를 바칠 것을 요구하는 군인에게 저항 한번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의 무기력에 대한 분노를 가진다. 그리고 영화는 어린 에노키즈가 배에서 구명튜브를 던져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구원될 길이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사는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밖에도 영화 내에서는 각종 상징들이 등장한다. 첫 살인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방의 전등이 걸려 있는 줄은 흡사 교수형을 연상시키는 매듭으로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살인 전과가 있는 ‘하루’의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나오는 장어 양식장에서 그녀의 대사(“그럼 사형이네.”) 다음에 ‘에노키즈’의 눈에 보이는 장면은 사람이 매달린 듯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작업복과 그 옆의 걸려있는 교수형 매듭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에노키즈’라는 인물의 폭력성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병폐로 가득 차 있고,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에노키즈의 부인과 아버지는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 다만 ‘에노키즈’의 아버지는 종교적인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에노키즈의 부인은 다른 남자가 시아버지의 부탁으로 관계를 맺는다고 하니 그의 이름을 부르며 관계를 맺는다. 그들이 부인을 공격한 개를 죽이는 장면을 보자. 해당 장면은 ‘에노키즈’의 살인 장면과 다를 바 없이 비슷하게 다뤄지고 있고 둘의 모습 또한 ‘에노키즈’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가족뿐 아니라 영화의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하루’는 돈을 다 가져가고 수없이 바람을 피우는 남편과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떠나고 싶어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살인 전과가 있는 사람이고, 손님들이 섹스하는 것을 몰래 보는 것을 즐긴다. 심지어 그녀는 하루가 눈앞에서 남편에게 강간당하는 것도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에노키즈가 하루의 어머니를 죽이려고 올라가는 장면은 남편과 며느리의 관계를 의심하는 에노키즈의 어머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과 중첩된다. 그리고 그녀가 남편과 며느리를 쳐다보는 모습은 하루의 어머니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생긴다. ‘에노키즈’가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에노키즈’가 죽이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개인적인 원한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는 그저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과거에 대해 나오는 장면은 잠깐뿐이다. 어린 에노키즈는 아버지의 무기력한 태도에 분노를 내비치고 그때부터 비행이 시작된다.

  
에노키즈는 아버지라는 존재로 표현되는 일본의 아버지 세대, 구 세대의 모습에 대한 일종의 반항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를 가두는 억압적인 제도를 벗어나려고 날뛰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 모두 사회 안에서 병폐되고 타락해버린 인물이다. 극 중 장어 양식장의 장어들을 비춰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양식장이라는 세계 속에 갇힌 채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파닥거리는 인물들의 모습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결국 에노키즈는 하루의 어머니와 달리, 진짜 자신이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을 죽이지 못했고 그렇기에 기쁠 수가 없다. 그가 진짜 죽이고 싶어 하는 아버지는 그는 결코 죽일 수가 없었다. 전후 아들 세대들이 그들이 증오하는 아버지 세대에게서 벗어날 수 없듯이 말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찍어 죽이라고 도끼를 건넬 때 에노키즈는 망설인다. 그의 아내가 도중에 끼어들지 않았어도 그는 끝내 도끼를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다.
 
-관련 없는 사람밖에 죽이지 못하면서!
-젠장, 죽이고 싶다. 당신을..
 
결국 양식장의 장어처럼 그는 양식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서만 팔딱거리는 존재일 뿐이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이 기괴한 한 남자의 일대기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 일본 사회의 병폐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남성신파 -<영웅본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