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더!> 리뷰
섣부른 말일수도 있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신작 <마더!>는 올해(2017년) 가장 강렬한 영화일 것이다. 개봉 전부터 평론가들 사이에서 극과 극으로 평이 나뉘더니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소위 말하는 호불호 갈리는 영화를 넘어서 극호와 극불호로 나뉘는 영화인 셈이다. 한 집을 둘러싼 이야기인 이 영화는 수많은 상징을 지극히 직접적으로(대놓고) 담고 있고 종국에는 그것을 꼬아서 아포칼립스를 만들어낸다.
오프닝을 보자. 불길 속에서 한 여자가 타오르고 있다. 그런데 그 얼굴, 제니퍼 로렌스의 얼굴이 아니다. 그러고는 불타버린 집에 ‘그’(Him, 하비에르 바르뎀)가 크리스탈 같은 물체를 올려놓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더니 ‘마더’(제니퍼 로렌스)가 일어나서 남편을 부른다.
‘그’는 영감을 잃고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에 빠져있는 시인이다. 어느 때처럼 빈 종이를 앞에 두고 고민하던 ‘그’가 창밖을 보며 뭐라 중얼거리자 외딴 곳에 홀로 떨어져있는 그들의 집에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리고는 그의 부인이 찾아오고 그들의 아들들이 들어오고 살인이 일어나고 집에 점점 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치더니 혼돈이 일어난다. 도대체 남의 집에서 뭐하는 짓인지 황당해할 즈음에 물난리로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난장판(Apocalypse) 속에서 그들은 사랑을 나누고 ‘마더’는 임신을 한다. ‘그’는 이것에 영감을 얻어 시를 쓰고 ‘마더’가 만삭이 될 즈음 완성한다. 그리고 시집이 엄청난 대인기를 끌면서 다시 그들의 집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며 대혼돈이 찾아온다. 이렇게 단순히 내용을 열거하기만 하면 영화를 보지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뭔 이딴 영화가 다 있어?’
하지만 영화는 이것을 친절하게(혹은 노골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놨다. 느닷없는 사건들에 당황하던 관객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영화의 내용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눈치채게 된다. 아마 대개 그 시점은 손님 부부가 그의 허락없이는 출입이 금기된 공간(서재)에서 금단의 것을 만져 깨뜨렸을 때부터일 것이다. 불같이 화를 내며 분노하는 ‘그’는 부부를 쫓아낼 것처럼 보였지만 뜬금없이 열심히 서재의 문을 봉쇄한다. “이러면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겠지.”라는 혼잣말을 하며 말이다. 아! 아담과 이브... 이처럼 이 영화의 상징들은 때때로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다. 그(신)가 남자(아담)를 집에 들인다(창조한다). 남자가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할 때 그의 갈비뼈에 흉터가 보인다. 그리고 다음날, 여자(이브)가 집으로 찾아온다. 여자는 남자를 꼬드겨 서재로 데려가 금기를 깨버리고 서재에서 추방당한다. 그리고 그들은 섹스를 하고, 그들의 아들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장남(카인)이 찾아오고, 당연하게 둘의 다툼이 시작된다. 결국 ‘그’가 내려쳐서 떨어뜨린 문고리로 장남이 둘째를 살해해버리고 집에는 사라지지 않는 핏자국이 남는다. 그리고 이후 장례식에 찾아오는 수많은 예의없는 손님들, 그들은 허락없이 공간에 침입하고 물건을 망가뜨리더니 마더가 칠해놓은 페인트까지 멋대로 바꿔버린다. 그걸 견디지 못 하고 일어나는 물난리, 일종의 대홍수로 인해 인간들은 사라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뜬금없는 섹스, 노골적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내는 이 영화에서 감독은 그들이 섹스를 했는지는 드러내지 않고 키스를 나누는 장면에서 끝낸다. 신성한 분위기를 풍기는 쌍팔년도식 화이트인 연출과 함께 장면이 전환되고는 아침에 눈을 뜬 ‘마더’가 갑자기 뭔가를 느끼고는 ‘그’에게 말한다. “나 임신했어요.”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한 누군가의 어머니처럼 말이다.
마더의 출산이 다가올 때쯤, 시집의 출간으로 인간들이 저택에 몰려오는 순간부터 영화는 아예 초현실적으로 급변하고, (관객에게만)황홀한 영화적 체험이 시작된다. 시를 자기를 위해 썼다고 생각하는 광신도들은 ‘그’의 말을 곡해·왜곡하고 잉크가 묻은 채로 얼굴을 만진 실수를 신성한 행위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는 대파국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인종청소, 홀로코스트, 중동문제 등 온갖 것을 상징하는 행위들이 한 집에서 펼쳐지고, 임신한 배와 가슴 등 여체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마더는 속절없이 농락당한다. 그렇게 고통받던 마더는 결국 구석진 방에서 아기(예수)를 출산하고 이를 축하하는 사람들(동방박사)이 선물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은 그 난리를 치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싶지 않다. 집의 생명을 불러오고 싶다는 그의 의지는 광적으로 치닫고 아기를 끝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 아이는 십자가 형상의 자세를 취하며 사람들에게 전시당하고 죽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분노하는 ‘마더’를 내려치는 것은 아벨과 마찬가지로 ‘그’가 부순 문고리다. 인류는 최초의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영화에서는 성경 내용의 짖궂은 비틀기가 몇 개 있는데 성서에서 선악과를 먹고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부끄러워 하지만 영화에서 부부는 오히려 섹스를 한다. 그리고 그의 둘째 아들(아벨)이 나타나서 마더에게 하는 말 “보기 좋네요.”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가장 지독하고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유머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직독직해 해버린 장면일 것이다.
셩경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할 때, 이 영화는 지극히 염세적이고 반(反)종교적·무신론·반(反)신론·무신론적이고 인간 비판적이다. 인류가 행해왔던 악행들을 상징하는 장면들, 끊임없이 집으로 몰려드는 인간들을 보여주며 감독은 현 인류는 답이 없고, 지구에는 쓸데없이 인간들이 너무 많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봤을 때 마더와 집(둘은 영화에서 거의 동일시되거나 연결되어 있는 존재로 다뤄진다)은 인류가 마음껏 착취하고 농락했던 대자연이자 현실판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마더’는 결국 모든 걸 다 내주고 (말 그대로)심장까지 빼다가 바친다.
이 영화에서 신은 지극히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존재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혹은 하지 않는다)는 게 감독의 생각 같다. 처음 살인이 일어날 때, 3층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노골적으로 권위적이고 신성하게 보이지만 계단을 내려와서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이들을 진정시켜서 싸움을 말리려는 것뿐이고, 그마저도 실패한다. ‘그’는 대책없이 인간들을 들이고는 그 이후 일어나는 혼란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만 보이고, 이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마더다. 남성화된 신에 의해 결정권에서 배제되고 착취당하는 마더는 남성의 역사에서 희생된 여성들로 보이기도 한다. 극중 마더는 고전적인 풍만한 몸매를 드러내는 옷을 주로 입고, 후반부에서는 가슴과 임신한 배가 돋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이브는 끊임없이 아기를 가지는 것에 중요성을 강조하고 부부관계가 인생의 모든 것인 것처럼 말하며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치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까지 마더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일하는 남편(심지어 그전까지는 글도 못 쓰고, 밤일도 못 하면서 아무것도 안하는 무능력한 인간)을 뒷바라지하는 역할일 뿐이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에게 부족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순종적인 모습을 보인다. 여자는 집에서 집안일이나 해야 한다는 인식에 맞게 끝끝내 집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면서.
마지막에 보여주는 대혼란에 대한 해결법, 인류가 모여있는 집을 불태우는 것은 현재의 시스템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아예 체제 자체를 전복시키고 새로 시작하자는 것과 그 파괴의 방식까지 <설국열차>의 마지막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설국열차>에서의 그 파괴가 기존 체제의 유지·역전이라는 틀 안에서만 생각하던 사람들 속에서 나온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라면 <마더!>에서의 파괴는 파국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해결책일 뿐이다. 백인이 주류집단인 사회에서 황인 여자아이와 흑인 여자아이만 살아남아 새로운 아담과 이브가 되는 희망적인 결말을 가진 것이 <설국열차>이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염세주의는 끝을 본다. 스스로 존재하는 ‘남자’는 그대로 살아있고 그녀는 더 이상 줄 게 없는 마지막까지 착취당한다.
크리스탈이 다시 자리를 찾고 집들이 정상이 되면서 영화는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간다. 침대에서는 또 다른 금발의 풍만한 여체를 가진 백인 여자가 일어나서 남편을 부르며 끝이 난다. 오프닝에서 불타는 여자가 제니퍼 로렌스가 아닌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다(크레딧에선 foremother로 나온다). 그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관객들은 이미 보았다. 설령 흑인 아담과 황인 이브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대상만 바뀐 채 착취의 순환은 반복될 뿐. 결국 이 영화는 어떤 짓을 하더라도 순환의 고리는 계속 될 것이라는 지독한 염세주의적 농담인 셈이다. 마더의 피와 눈물이 담긴 심장은 아담과 이브에 의해 끝없이 깨질 것이다.
너무나 직접적으로 상징을 표현하기에 성경의 내용을 조금만 안다면 해석의 어려움이 크지는 않고 오히려 그 노골적 직유에 영화자체가 얄팍하게 보이기도 한다. 표현에 있어서 이 영화는 주인공이 수난당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한 편의 SM 포르노그래피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강렬하게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강제로 관객의 입을 벌리고 떠먹이는듯한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그걸 그대로 받아먹거나 토해내는 것 둘로 나뉘는 것이다. 지극히 단순하고 전시적이라는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이해가 가기에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건 꽤 고심해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고 싶다.
P.S. 영화 속 ‘그’, 예술가는 대런 아로노프스키 자신일 수도. 남자가 처음 집에 왔을 때 마더를 보고 아내가 아니라 딸인 줄 알았다는 말을 하는데 대런 아로노프스키와 그의 실제 연인 제니퍼 로렌스의 나이차는 21살로 딸뻘이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고통받는 예술가는 그 스트레스를 뮤즈에게 발산해 극단까지 몰고간 끝에야 비로소 다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마더가 ‘그’의 완성된 작품을 보고 “이제 나를 떠날 건가요?”라고 묻는 것은 그녀의 역할은 예술의 영감과 소재일 뿐이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결국 그녀는 전 여자처럼 헌신짝처럼 버려진다. 그리고 또다시 등장하는, 역시 어리고 금발인 백인 여자는 제니퍼 로렌스 이후 예술가의 새로운 뮤즈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