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other branding Jun 15. 2021

참고 견디는 것이
성숙한 것만은 아니다.

개인의 환경을 단정 짓는 권위적인 말들


참고 견디는 것이 성숙한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환경에서 꾸준히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 환경은 누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닌 오로지 내가 선택한 경험들이 쌓인 <나의 환경>이다. 나의 생각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또 그러한 것들이 하루하루 쌓여 나의 환경(배경)을 만들어간다. 내가 만약 회색빛의 회사를 다니고 있다면 언젠가 나는 회색으로 물들거나 혹은 정반대로 다채로운 색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과정이 어찌 되었든 내가 속한 환경에서 겪은 경험들로 나의 미래에 대한 선택을 하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린 많은 감정과 생각을 배운다. 이해와 공감, 분노와 혐오, 올바름과 잘못됨 등을 말이다. 


내가 겪고 배우고 말로 표현하지 못할 이 모든 것들의 기준은 오로지 나만 느끼고 나만 알 수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나를 적당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처한 어떤 문제에 대한 고충과 해결 방법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다. 사실 나의 고충을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고마울 뿐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요즘에는 상대방의 경험과 기준을 함부로 재단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생각되었다.



최근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디자인적으로 원활하게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현명한 걸까요?”

가장 큰 맥락의 두 가지 대답을 받았다.

 A:  “일단 기획단계에서 클라이언트와 함께 참여를 해서, 어떤 식으로 디자인이 구축될 것인지 함께 논의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시안에 대한 결과물도 함께 예상을 하고 시안 개수에 대한 협의도 너무나 중요한 문제.. 어쩌고 저쩌고..”라고 말이다. 아주 당연하게 예상을 할 수 있는 대답이다. 그러나 실제로 저런 질문을 했을 때 가장 많이 돌아오는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B : “고민하지 말고, 그냥 클라이언트가 해달라는 대로 수정해주세요” 뭐 대충 이런 뉘앙스와 메시지가 돌아온다. 디자이너들은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지 않은가?

A의 대답에 대해서는 '어떻게 소통을 하는지'에 대한 건설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약간의 언쟁은 있었으나 결국 배울 수 있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러나 B의 대답에서 오고 간 소통은 어떻게 소통을 하는지가 아닌 왜 내가 참아야 하는지에 대한 소모적인 고민들을 했고 피곤한 대화들만 오고 갔다. 그리고 B의 대답을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말들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성숙한 겁니다” “참지 못한다면 아직 어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고 견디는 것이 성숙한 것인가? 성숙함은 과연 무엇일까?

만약 참고 견디는 게 성숙한 거라면, 참지 않고 투쟁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걸까?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익숙해졌고, 그제야 감정적으로 편안하고 안정을 찾았고, 또는 체념했을 수도 있는 자신의 과거 감정과 감성은 되돌아보지 못한 채, 너무나도 가볍게 타인을 재단하는 것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이 살아온 환경에서는 무조건적인 인내가 성숙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기준에 비해 시간적으로 다른 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본인의 기준에 맞춰 말 몇 마디로 재단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더욱이나 이러한 현상이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을 태어날 때부터 교육받았으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말 한마디로 정의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은 특별한 거 없이 그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는 것 밖에 없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참고 견디는 것이 정답이 될 수도 있다. 또 상황에 따라 참는 것이 성숙함이 될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면, 한 사람의 환경에 개인적인 견해를 개입하여 생각하고 함께 고민을 나누고, 또 적어도 그 고민이 헛된 고민이 아니라는 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할 테고, 적어도 성숙이니 뭐니 하는 타인을 재단하려는 단어는 절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상대방이 어떠한 이야기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주는 개인] 그리고 그런 개인을 넘어 사회까지. 나(개인)의 기준이 아닌, 고민을 하는 당사자(개인)의 기준으로 생각해줄 수 있는 '개인주의적 마인드'는 세상 그 누구에게나 조금씩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사라고 다 옳은 건 아니잖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