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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포선라이즈 May 19. 2020

이젠  널 인정하려해

밀리의 서재를 다시 깔았다. 이북은 좋은거구나.





책을 좋아한다는 말은

책을 사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책을 책상에 쌓아놓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며

책을 들고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고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도 된다






책벌레라고까지 할 만큼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책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백과사전과 세계 위인전집을 선물 받았던 순간은 여덟살 인생 최대의 사건이었다. 웅진에서 나온 영업사원의 긴 설명을 듣고 엄마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꽤 큰 금액을 현금으로 지불했다. 좁은 집이었지만, 책장 한편을 가득 채웠던 전집의 포스. 그게 다 나를 위한 책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거대하고 풍성한 기쁨이었다. 소확행이 아니라 다확행이라고 해야 할까. 많은 책이 주는 행복. 한 권 한 권 초콜릿 까먹듯 책을 꺼내 읽은 기억이 난다. 물론 연년생인 내 동생은 나와는 생각이 달랐는지, 단 한 권도 읽지 않는 기염을 토했다.



그 이후에 전집을 산 적은 없다. 내가 읽고 싶을 때마다 서점에 가서 책을 사서 봤다. 엄마한테 졸라서 만원 한 장 받아 들고 덜렁덜렁 걸어 언덕 너머 횡단보도를 건너면 버스정류장 앞에 있었던 동네 서점. 그곳에 가서 한 달에 한두 번씩 책을 사 왔다. 이문열의 삼국지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더불어 속독도 유행이었다. 속독 학원도 있었고, 한 시간이면 두꺼운 소설을 한편 다 읽는다고 하는 마법의 속독 기술을 어필하는 광고를 신문에서 볼 때마다 그 학원이 궁금했다. 나는 책을 느리게 한 줄 한 줄 꾹꾹 눌러가며 읽는 편이라서 한 권을 읽는데 몇 날이 걸렸다. 그걸 다 읽고 나면 또 엄마에게 만원을 받아서 서점을 향했다.


독서에 어떤 로망 같은 것이 생긴 계기는 그 당시 고등학생이라면 별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고등학생이었고, 그때 젊은 여자분이셨던 영어 선생님께서 눈을 반짝이면서 우리에게 상실의 시대를 소개해주셨다. 뭐랄까, 성숙한 독서의 시작처럼 느껴졌던 그 소설을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감탄했던 여고생의 나. 이해가 되지 않아도 좋았다. 맥주, 대학생, 좋아하는 마음 같은 것들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적혀있었다. 미도리라는 이름도 맘에 들었고 주인공의 찌질함도 신선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런 책을 읽는 내가 좋았다.



대학에 들어가고 톨스토이의 전집을 읽겠다고 달려들었다. 부지런히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출했다. 대출이라는 말에 은행보다 도서관이 먼저 떠오른다면 청춘이다. 들고 다니고, 틈틈이 읽었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내용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상하권은 굉장히 두꺼웠고, 등장인물 이름이 봐도 봐도 입에 붙지 않았다. 가족 구성원 관계도를 채 이해하지 못한 채 반납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지적인 대학생 코스프레를 하기에는 나쁘지 않아서였는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톨스토이를 읽었다.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던가 니코스 카잔 차스키의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책도 맥락을 같이 한다.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런 책을 들고 다니고, 한동안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어디든지 앉아서 읽었다는 사실이 독서만큼이나 중요했다. 책이라는 사물의 물리적인 존재감, 책장에서 느껴지는 표면의 촉감과 잉크 향 섞인 큼큼한 종이의 냄새. 나는 책의 내용과 별개로 그런 외적인 책의 존재감을 좋아한거다. 전문용어로 겉멋 들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처음 전자책을 브랜드로 접한 것은 킨들. 십여 년 전이었다. 주위의 트렌드에 민감한 얼리어답터들이 하나 둘 킨들을 구입해서 가져온 것을 이리저리 만져봤다. 오, 멋지다. 가볍다. 괜찮다. 그 안에 몇백 권의 책이 들어간다고 했다. 너무 대단한데 여러 가지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 같았다. 우선 책을 읽다가 앞의 내용이 궁금하면 후루룩 앞장으로 책을 넘겨서 다시 찾아보고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이 한 장짜리 디스플레이로 그런 나의 독서습관의 촉감적인 만족도를 구현할 수 있기는 한 거야? 무엇보다도 디스플레이라는 것이 종이를 대신한다는 것 자체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감히. 내가 종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책은 아무래도 종이지. 나는 전자책을 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책이라고 하기보다는 책을 보여주는 디스플레이에 대한 부정은 쭉 이어졌다. e-book을 책으로 쳐주지 않는 나의 고집과 상관없이 전자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 많은 기업들이 뛰어들고 경쟁하고 발전시켜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밀리의 서재" 광고를 보게 된다. 이병헌과 변요한이 나와서 서로의 근사한 목소리로 경쟁하듯 책 제목을 읊었다. 책 한 권 값으로 무제한 독서라니 지적 허영심을 간질였다. 꽤 잘 만든 광고였고, 매력적이었다. 광고의 효과란 이런 것인가, 그날로 밀리의 서재 어플을 다운로드하였다. 독서 경험의 새로운 국면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아직 없는 책이 많았다. 구비된 콘텐츠가 협소했고, 어설펐다. 단숨에 실망했다. 디스플레이는 책이 될 수 없어, 라는 나의 생각을 다시 확인하는 한 달이었다. 한 달 무료체험을 마치는 동안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어플을 지웠다.



둘째를 출산한 후부터 최근까지는 책을 예전처럼 많이 읽지 못했다. 책을 읽으려면 일련의 행동절차가 필요했는데 책을 사러 서점에 가서, 한참 책 속에 둘러싸여 책을 고른 후, 여기저기서 책을 읽거나 아니면 도서관에 가서, 한참 책 속에 둘러싸여 책을 고른 후, 여기저기서 책을 읽는 것이다. 또는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서 한참 책을 고른 후, 책을 배송받아서, 여기저기서 책을 읽는 것. 그렇다. 나는 책을 읽기 전에 "한참"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육아를 하는 사람에게 "한참"이라는 시간은 정말 한참 멀리 있는 시간이었다. 일상 속 여기저기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서 책 읽을 기회가 생기면 책이 곁에 없거나, 본격적으로 책을 읽으려 들면 책 읽을 시간이 없는 상황에 놓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들 둘이라는 막강한 핑계가 나와 책 사이에 놓여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려는 현장을 세 살 아들에게 발각당하는 순간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조르기 때문에 사실상 집에서 내가 원하는 우아한 독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게 조금 빈곤하게 독서생활은 이어졌고 최근에 가볍게 읽고 싶은 책들이 생겼다. 앞장을 다시 넘겨가면서 꾹꾹 진지하게 읽을 그런 책들이 아니라 아주 가볍고 경쾌한 독서가 당겼다. 술을 아무리 좋아해도 위스키가 아니라 스파클링 와인이 먹고 싶은 날이 있는 것처럼. 소주가 아니라 이슬 톡톡이 먹고 싶은 기분처럼 말이다. 회사에서 빌려온 책을 외출할 때마다 들고나가지만 매번 가방 속에서 기저귀들과 함께 맴돌다가 한 장 제대로 펼쳐지지도 못한 채 반납기한을 넘기고 연체되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하면서, 대출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지금 유연하고 탄력적인 독서가 필요한 것이다.



그때 마침 밀리의 서재가 다시 떠올랐다. 첫 달 무료라는 헤드라인에 무료 찬스를 이미 사용한 것을 홀랑 까먹고 다시 깔았다. 12000원이 덜컥 결제되어버렸다. 앗, 그럼 해지할까? 싶었는데 아이폰에서 구독해 지하는 절차가 너무 복잡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이 한 달만 이용해봐야겠다, 하고 둘러봤다. 밀리의 서재는 내가 기억하는 그 플랫폼이 아니었다. 생기가 넘친다고 해야 할까? 아우라가 달라져있었다. 데뷔 무대를 보고 별로라고 생각했던 아이돌이 어딘지 모르게 노련해지고 여기저기 알게 모르게 손을 봐서 매력적인 인기 아이돌이 되어 나타난 것 같았다. 개인기 같은 것도 연마해서 말이다. 밀리의 서재라는 이름은 그대로인데 우선 검색하는 책이 다 갖춰져 있었다! 큐레이팅도 예전보다 한결 좋아진 것이 느껴졌다. 내가 읽으려고 했던 것은 위비 북스의 "아무튼"시리즈였는데 단숨에 아무튼 한 권을 읽어치웠다! 굉장해! 디스플레이의 거부감이라는 것이 사라진 것일까? 나는 내 스마트폰으로는 난독증이 와서 뉴스 기사도 처음부터 끝까지 못 읽는 사람인데, 영문은 모르겠지만 이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은 역시 진화하는 건가. 아니면 밀리의 서재가 진화를 한 건가. 한 권을 하루 만에 읽어버리고서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책을 고르려고 어플 속을 서성거리다가 오디오북을 발견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오디오북 서비스는 이거야말로 취향저격이었다. 나는 오디오북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로봇처럼 읽어주는 서비스라고 착각했다. 그런데 밀리의 서재에서는 제공하는 오디오북이란 책의 전반적인 흐름과 방향을 적당히 요약하고, 읽는 사람의 의견을 담아서 인상적인 부분들을 발췌해서 읽어주는 식이었다. 궁금은 했는데 처음부터 다 읽어보기는 시간이나 노력을 투입할 정도는 아닌 그런 책들을 훑어가는 방법으로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주말에 강원도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세 남자가 모두 잠이 들었다. 깨어있으면 이 노래 틀어달라 저 노래 틀어달라 신청곡이 끊이지 않는 남자들인데 모두 잠든 후에 나는 비로소 독서의 자유를 획득하게 됐다. 세 시간 정도 운전을 하는 동안에 밀리의 서재에서 두세권 정도의 오디오북을 읽었다. 읽었다고 해야 할지 들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읽은 걸로 하자. 운전을 하면서 책을 읽다니. 밀리는 구간에서도 밀리의 서재가 있어서 즐거웠다. 라디오를 들을 수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운전 중의 독서,  지식을 흡수하는 기분으로 운전을 하는 것이다.  



처음 이북을 접했을 때와 현재 나의 상황이 많이 달라진 점을 간과할 수는 없겠다. 혈혈단신 원하면 언제든지 책을 살 수도 있고 고를 수도 있고 읽을 수도 있던 내가 아니다. 아들이 둘이고, 막내아들의 책을 읽어줘야 하고, 큰아들의 숙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자유로우면서도 자유가 아닌 몸의 나에게 이북은 새로운 문물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듯이 사람과 물건과의 만남 또한 타이밍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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