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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포선라이즈 Aug 20. 2020

낭만에 대하여

낭만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나이가 많거나, 나이가 많은 거겠지








    그 무렵 나에게는 이 나라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퇴근 후, 한강에서 친구를 만나 라면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외국 어딜 가도 도시 한가운데에 이렇게 크고 넓은 강이 흐르는 나라는 없대, 하면서 한강의 무드를 자랑스러워했다. 이런 소리 하면 옛날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제하고 싶지만, 그때는 한강의 낭만에 진정성이 있었다. 미세먼지도 없었고, 팝업텐트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니 뭐니 해서 한강에 못 나가본 몇 해 사이, 한강은 너무 많이 달라져있었다. 무척 아끼고 사랑했던 여의도 한강공원에  팝업텐트가 다닥다닥 들어서 있는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아 몇 번이나 눈을 씻고 다시 봐도 그곳엔 낭만을 대신하는 팝업텐트가 가득 차 있었다. 듬성듬성 돗자리나 신문 같은걸 깔고 앉아서 저마다 조용히 웃고 떠들던 한강은 사라져버렸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음 아무래도 팝업텐트때문이다. 뭔가 본격적인 느낌의 팝업텐트가 대규모 빌라단지처럼 빼곡히 들어선 것은 낭만적이지 못했다. 그 전의 조금 심심했던 불규칙하고 수수한 한강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알지 못하는 요즘 시대에 적합한 팝업 같은 낭만인건지도 모르겠다.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고 안 낭만적인 것이 아닐 텐데도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를 다 들고 다녀야 마음이 놓이던 시절도 있었다. 필름 카메라가 곧 낭만이라는 무언의 공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었지만, 어떻게 나왔을지 정확한 결과값을 즉시 알 수 없었던 24컷에 대한 두근거림을 좋아했다. 막상 현상해보면 노출이 벗어난 사진이나 초점이 나간 사짐들마저도 낭만이라 여겼다.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고 몇시간 근처 카페에서 인화를 기다리는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다이어리를 정리했다. 디카를 사용한 이후에도 한동안은 두 가지를 혼용했다. 낭만에 임하는 나의 자세는 그토록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구난. 물론 지금의 나는 아이폰으로만 사진을 찍게 됐다. 나는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은 사람인 건가.  


맞다. 우리에게는 낭만이 무엇보다 중요하던 시기가 있었다.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닌. 낭만에 목숨을 걸곤 했던 시절. 낭만의 절정은 제주도였다. 그 시절 제주 또한 지금처럼 핫한 장소라고 여겨지는 곳은 아니었다. 섬에 있는 시골마을, 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는데. 가끔 제주도가 고향이라는 친구들을 보면, 제주도는 뭔가 먼 고향의 느낌이 잘 어울리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스물여덟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제주도에 가게 됐다. 제주도는 신혼여행으로나 가는 곳이지, 일반적인 여행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제주도로 목적지를 정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리조트가 있다는 이유였다. 친구의 회사 리조트에서 2박, 우리 회사 리조트에서 2박. 그렇게 결정했고, 떠났다. 아직 운전이 미숙했던 우리에게 누구도 차를 내어주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운전경력 여부는 따지지 않고 면허증 소지 여부만 따지 렌터카에게 정당하게 차를 빌려 우리는 처음으로 제주도를 여행하게 됐다. 아슬아슬한 운전 솜씨가 한몫했겠지만 그 여행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와 너무 비현실적이야"


처음 가보는 제주도는 정말 비현실적이었다. 이제와서는 모두가 알게 되었지만, 왜 여태껏 아무도 제주도라는 곳의 낭만을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는지 애석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로키 산맥의 빙하가 녹아내린 물이 모여서 에메랄드빛을 이룬다는 루이스 호수 같은 것을 보기 위해  열몇 시간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의 캐나다까지 가지 않아도 제주도의 협재 바다에서 그러한 색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였지만, 우리나라 같지 않았다. 낮게 깔린 작은 집들은 어느 방향으로도 하늘을 가리지 않았고, 그래서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한라산을 올라가서, 뭔가 자연이 줄 수 있는 신비로움과 환상적인 낭만을 마주하게 됐다. 아, 자연이 이토록 낭만적일 수가 있구나. 산 위에서 구름과 아이컨텍하는 것이 이렇게 설레는 일이었구나.


그때부터 제주도에 대한 애절한 감정을 품고 살았다. 제주에 집 한 채 사고 싶다고 농담처럼 말한 우리와는 달리 그 무렵을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로 이민을 갔고 제주도 부동산이 급등했다. 제주도가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몰라보게 핫한 여행지가 됐다. 언제 가도 사람이 북적인다. 모두의 제주가 된 것이다.






낭만의 자리를 뺏은 것은 "감성"이다. 필름 카메라로 추구하던 사진이 낭만이라면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에 필터를 쓰고 색감을 입히는 것은 "감성"이 아닌가. 그게 그거 같지만, 그게 그게 아니니까. 차를 몰고 가다가 아무 곳에나 마음에 드는 장소에 정박하고서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화장실도 없는 곳에서 여차저차 좌충우돌하며 캠핑을 하는 것은 낭만이지만, 하얀 텐트에 원목 소품 완비, 잘 세팅된 캠핑 메뉴와 노란 빛깔의 조명으로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캠핑은 "감성캠핑"이다.



감성을 부추긴 것은 인스타그램이다. 인스타에 올리려면 부대찌개마저도 감성이 있어 보이는 요즘이니까. 나도 인스타에 푹 빠져 지내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조금 질렸다. 인스타 권태기, 인태 기라는 말로 그런 것을 표현한다. 인스타그램이라는 플랫폼에 질렸다기보다는 거기 올라오는 감성적인 것들에 질린 것이다. 요즘은 무엇이든 다 아름답고 정갈하고 "감성"이 있다. 화장실 청소하는 락스까지도 감성적인 패키지로 나오는 시대니까. 그냥 좀 어수선한 상태라도 좋을 것 같아서 지저분했던 어린 시절 내 방도 그립고, 낭만도 그리운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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