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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핑거 Jul 04. 2023

7화. 저 세계 여행 다녀올게요!

100도로 끓고 있는 나를 만나고 싶다.

몇 주 뒤, 책도 빌릴 겸 추억도 소환할 겸 졸업했던 학교에 갔다. 도서관 후문으로 들어갔다가 정문으로 나오자 커다란 플래카드를 마주했다.



강연 소식 : 바람의 딸, 한비야의 무엇이 가슴을 뛰게 하는가.
일시 : 2014년 7월 14일 오전 10시
장소 : 본관 3층 대회의실



[연금술사]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그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돕는다.'라고 했던가. 회사를 그만둔 것도, 그래서 평일 오후 모교에 들를 수 있었던 것도, 이 플래카드를 보게 된 것도, 모두 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일어난 일인 것만 같았다. 열일곱 살의 나에게 꿈을 심어준 그녀를 말이다.




견딜 수 없는 뜨거움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이 말과 함께 청중에게 불화살을 쏘는 시늉을 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99도와 100도는 온도로써는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가슴속 1도 차이는 아예 다른 차원이라고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99도는 '무언가 때문에' 하는 것이다.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와 같은 조건이 붙는다. 100도가 되어야 진짜인 것이다.



15년 전 그녀가 맞았던 불화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오지 여행을 통해 전혀 모르던 세상을 알게 되었다. 1000원, 2000원으로 사람이 죽고 사는 세상을 보았다. 이후 귀국 후 '긴급 구호'가 뭔지도 잘 몰랐지만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여행하며 본 죽어가는 이 들을 살리고 있던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을 자신도 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걸 본 월드비전에서 연락이 와서 긴급구호 팀장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긴급구호 팀장으로서 한 안과 의사가 열심히 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케냐로 향했다. 미혼이었던 그녀는 그 의사도 미혼이라는 얘기를 듣고 평소 좋아했던 넬슨 만델라의 미소를 기대하며, 40시간을 날아서 마을에 도착했다. 부족장, 종교 지도자, 부녀회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들은 7년간 가뭄으로 거의 목숨을 연명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부족장이 악수를 하자고 내미는 손에는 피고름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온 몸에도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풍토병이었다. 그녀도 그때는 처음이라 너무 무서워서 한국인들은 악수를 하지 않는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싸갔던 컵라면과 볶음 김치로 충격받은 마음을 달래고, 안과 의사를 만나러 갔다.



사막 한가운데 사람들이 피를 뚝뚝 흘리며 줄을 서있고, 그 앞으로 의사의 뒤통수가 보였다. 넬슨 만델라를 기대하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대실망을 했다고 했다. 세상에 그렇게 못생긴 사람은 처음 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실망도 잠시, 10분 만에 그녀의 입에서 신음과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멋있다!" 그를 보며 100도와 99도의 차이, 그 1도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딱 떨어지는 그때, 100 퍼센트 몰두하는 그 모습이 100도로 끓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느덧 밤이 되어 그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나이로비에서 유명하고 돈도 많이 버는 의사로 알고 있는데, 왜 여기까지 와서 이 일을 하냐고 그녀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가 가진 재능과 기술을 돈 버는데 만 쓰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무엇 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죠.




그녀는 머리를 한 대 쾅 얻어맞는 기분이었고, 이런 말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내 가슴도 함께 뛰었다. 그때 케냐에서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지금 한국에 있는 내 가슴에도 와닿는 듯했다.  



그녀가 이 강연을 하러 온 이유는 이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청춘들에게 0.1그램의 응원을 더해 주러 왔다고 했다. 하지만 강연을 듣는 내내 나에게는 1톤 급 응원이었다. 이젠 정말 '나의 길'을 가도 좋겠다는, 아니 가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여행은 나 답게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지만, 언젠가는 '100도씨로 끓고 있는 나'를 만나고 싶었다.



경제 개념이 전혀 없던 내가 그날 이후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반년 동안 최대한 많은 돈을 모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다녀온 선배 여행자들의 블로그와 책들을 뒤져가며 정보를 모았다. 세계 각국의 주요 명소, 가고 싶은 곳 등 리스트도 정리했다. 대략적인 루트와 예산도 짜고, 경비 마련 계획도 세웠다. 장기간 여행하며 경비를 어떻게 보관하고 관리할지에 대한 대책도 꼼꼼히 체크했다. 7가지 예방접종도 맞았다. 루트에 아프리카도 포함했기 때문에 말라리아 예방약도 준비했다. 



필요한 물품 구매 비용을 빼면 퇴직금에서 남은 돈과 입시 학원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합쳐서 겨우 1200만 원 정도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일단 3개월 간 동남아 여행을 끝내고 호주로 날아가 워킹홀리데이로 추가 경비를 마련하기로 했다. 호주로 결정한 이유는 여행 경로상 중간에 거쳐 가기에 괜찮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호주는 최저 시급이 높아서 무슨 일을 해도 돈을 모으기에 좋다는 정보가 많았다. 그리고 매년 인원을 많이 받아서 신청하기만 하면 비자가 잘 나온다고 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여행 준비를 해나갔다.  



드디어 한 달 뒤 출국하는 비행기표를 끊어놓고 거실에 있는 큰 TV와 노트북을 연결했다. 그러고는 부모님을 거실로 초대했다. 4개월 동안 준비한 자료를 띄워놓고 발표를 시작했다. 그동안 해왔던 고민들과 결심,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44페이지 분량의 PPT 슬라이드였다.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성인인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부모님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 마음을 최대한 이해시켜드리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 슬라이드를 정리하면서 스스로도 다시 한번 방향을 점검하고 확고히 할 수 있었다. 1시간가량의 발표를 마무리 하자, 내 가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부모님의 가슴에 가 닿은 듯 했다. 



"뭐라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이렇게 까지 하고 싶은 거면 해야지, 우짜겠노. 대신에 무조건 안전하게 몸조심해가 갔나 온나." 



100도씨를 완성해주는 마지막 0.1그램의 응원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세계 여행을 꿈꾸기 시작한 이래로 12년 동안 나를 붙들고 있었던 건 부모님도, 사회도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이었다.



2015년 2월 8일, 스물아홉이 되던 해 말레이시아행 편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모님께는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계획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여행은, 이 배움의 길은 언제 끝날 지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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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배낭 여행을 다녀온 이 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블로그에 쓰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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