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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핑거 Jul 05. 2023

8화. 쿠알라룸푸르의 무서운 얼굴을 한 현자

힌두교인이자, 불자이자, 크리스천 이라고?

내 앞에 검은색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체크아웃을 하고 밖으로 나와 카우치 숙박 호스트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지난밤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해서 공항 근처에 있는 호스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오늘은 현지인의 집에서 지내면서 그들의 문화도 체험해 보자는 취지로 카우치 숙박을 예약했다. 



애초에 여행의 목적이 관광이 아니었기 때문에 '카우치서핑'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에어비앤비와 다른 점은 무료라는 거였다. 대신 나도 무언가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청소를 돕는다던지, 한국 문화를 소개하거나 요리를 해주는 등의 활발한 교류를 해야 했다. 돈도 아끼고 현지인과 친구도 될 수 있는, 말 그대로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차에서 엄청난 덩치와 까만 피부의 우락부락한 사내가 내렸다. 

 

'설마… …' 


"Are you Lotus?” 그 사내가 차에서 내려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아니길 바랐지만 틀림없었다. 복잡한 심정이었다. 괜스레 겁이 났다. 꼼꼼히 확인한다고 했는데 방심했는지, 뭐에 홀렸었는지 사진도, 성별도 확인하지 않고 바로 예약해버렸다. '나 왜 그랬지.'

 


예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카우치 숙박 관련 기사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무료이고 여행자들 커뮤니티인지라 관리가 느슨한 점을 틈타 호스트와 게스트 사이에 성추행과 성폭행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리뷰를 꼼꼼히 읽고 프로필을 자세히 체크하라고 당부했었다. 



그가 내 배낭을 받아서 트렁크에 실어주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그의 집으로 향하는 내내 겉으로는 반가운 척 맞장구쳤지만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고층 아파트들이 모여 있는 단지에 들어섰다. 차에서 내려 배낭을 챙겨 엘리베이터를 탔다. 32층에 내렸다. 그가 현관문을 열고 있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이 집에 들어가면 이 사내와 둘이 있게 될 텐데,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이 사내를 이겨낼 수 있을까?



숙소 환경은 기대 이상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리석 바닥의 넓은 거실 한편에 소파가 놓여 있었다. 탁 트인 창문 너머로 도시가 내려다 보였다. 그가 집을 소개해주었다. 방 세 개 중에 하나는 서재처럼 꾸며져 있었다. 다른 두 개의 방을 보여주며 내가 묶고 싶은 방을 고르라고 했다. 이 아파트는 세컨드 사무실로 쓰고 있는데, 방들도 비어 있어서 카우치 숙박을 제공하는 곳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당분간은 나 혼자 지내면 된다고 했다. 본인은 낮에는 여기 있다가 밤에는 집에 가서 잔다고 했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는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으로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휴대폰 부품 무역 사업으로 꽤 성공했다. 호주에서 몇 년 살기도 했고 여기저기 여행도 많이 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로이의 친구들이었다. 그가 현관문을 열자 로이처럼 거칠게 생긴 4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흑인들만큼이나 피부가 까맣고 덩치가 컸다. 인도인 특유의 희번덕 한 눈이 무섭게 느껴졌다. 지금 여기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였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곳 말이다. 그것도 어떤 사내의 집이었다. 나 혼자 여자였고 5명의 덩치 큰 외국인 남자들과 함께 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이란 건 분명했다. 카우치 숙박 중 일어났다는 기사 속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계속 생각났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같이 저녁을 먹는 마는 둥 하다가 피곤하다는 핑계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마음을 졸이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그들이 아직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가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전날 밤 저녁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지, 일찍부터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때마침 로이가 도착했다. 양손 가득 뭔가를 들고 왔다. 집에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혹시 내가 배고플까 봐 일찍 왔다고 했다. 신이 난 듯한 표정으로 손에 든 것을 식탁에 펼쳐 보이며 말했다. "네가 가장 말레이스러운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나르시막을 좀 사와봤어." 



말레이시아 국민 음식, 나시르막



밥에 커리 소스를 얹은 구운 닭고기, 땅콩 멸치 볶음, 계란, 오이 등을 곁들여 먹는 가정식 백반이었다. 그럭저럭 먹을만했지만 로이를 위해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먹었다. 



식사를 끝내자 가고 싶은 곳이 없냐고 나에게 물었다. 사실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왔다. 대략적으로 어느 나라와 도시들을 갈 건지 루트와 일정만 정했다. 각 도시 관광 정보는 현지에서 해결하려고 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차로 여기저기 데려가 구경시켜 주겠노라고 했다. 



그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에 대한 칭찬 일색의 리뷰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도 내주고 끼니도 챙겨주고 운전기사에 가이드 역할까지 해주는 것이 고마워서 점심은 내가 대접하겠다고 해도, 한사코 자신이 지불하겠다고 했다. 내 장기 여행은 이제 시작이니 돈을 아껴두라는 것이었다. 첫인상과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속으로 그를 경계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저녁은 내가 직접 요리해서 로이에게 대접하고 싶었다. 말레이시아에서 할 수 있는 한국 요리를 생각해보다가 파전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밀가루, 달걀, 파, 양파, 간장은 전 세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상황에 따라 조개나 새우를 추가하면 되는 간단한 요리였다. 코리안 팬케이크라고 소개했다. 꽤나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어서 다행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대화가 깊어졌다. 그가 내 여행의 이유에 대해 물었다. “어느 새 부터인가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고, 가슴 한켠에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내가 누구인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보고 듣고 싶었다”라고 내가 답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로이가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그는 항상 세 가지 방법으로 현상을 바라본다고 했다. 첫 번째는 과학적인 접근법, 두 번째는 철학적인 접근법, 마지막으로 영적인 접근법. 



"영적인?" 나에겐 낯선 언어였다.  



"응. 영적인. 사람들이 흔히 신이라고 일컫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관한 것이지. 여기서 말하는 영적이라는 건 종교에 국한된 게 아냐. 신은 종교 보다 훨씬 큰 거야." 그는 힌두교 배경에서 나고 자랐지만 동시에 불자이자 크리스천이라고 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이야,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거야."  그가 엄지부터 검지, 중지를 차례로 접으며 동시에 말했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


그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나도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의 말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파도는 바다로부터 나와서 다시 바다로 돌아가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야.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고, 성공이 있으면 실패와 좌절할 때도 있는 법이지. 우리 모두의 인생을 각각 하나의 파도라고 보면 돼. 한번 친 파도는 다시 바닷속으로 사라지듯,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어. 매일을 새로운 삶을 대하듯 깨어날 수 있다면 모든 순간이 소중해지지. 

내 영어가 부족해서 인지 내용이 난해해서 인지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듯 말 듯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신으로부터 이 삶을 빌린 거야. 우린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잖아.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렸어. 늘 무언가 시도하는 걸 멈추지 말았으면 해.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면 돼. 모든 충고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늘 균형을 유지하고 현명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해야 해."   



로이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생존이 해결 되었다면 Legacy(레거시)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행복의 열쇠야. 이 몸과 마음이 세상에 왔다가 떠날 때 이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해. 예술가들은 후세에 길이 남을 그림이나 음악, 책과 같은 작품을 남기기도해. 


하지만 그리 거창하지 않아도 좋아. 아이 하나를 바르게 키우는 것도 레거시지. 바르게 자란 아이가 커서 또 자신만의 레거시를 남기고 갈테니. 정성껏 요리를 해서 식당을 여는 것도 레거시가 될 수 있지. 많은 사람들이 그 음식으로 영양을 보충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레거시에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될테니까. 그런 것까지 생각하며 요리를 하는 것이 레거시지. 


죽고 나면 세상이 나를 기억하지 못 해도 상관없어. 다만 살아있는 동안은 나의 에너지가 이 세상에 도움되는 것에 쓰이길 바랄 뿐이야. 내년에는 와인 수출 사업을 시작할 생각인데, 나는 이렇게 여러 사업을 통해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내 레거시라고 생각해.”



로이가 말하는 ‘레거시’와 책 [연금술사]에서의 ‘자아의 신화’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의 레거시는 뭘까?’ 


어린 시절 아이들을 따라 초코파이를 얻어먹으러 교회에 따라갔던 적이 있었다. 교회라면 치를 떨었던 아버지에게 들켜서 흠씬 두들겨 맞고 나서부터는 교회와 종교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지금 로이가 하는 말을 정확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신은 종교보다 큰 것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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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배낭 여행을 다녀온 이 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블로그에 쓰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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