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oker Nov 09. 2017

<리빙보이 인 뉴욕> 한 편의 소설을 '보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과 같았던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을 보고 왔습니다.

아니 사실 이 영화는 한 편의 소설입니다. 

이전에는 낭만과 예술의 도시였으나 지금은 죽어버린 도시 뉴욕에 사는 한 명의 소년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하나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

<리빙보이 인 뉴욕>은 어쩌면 무리하게 생각될 수 있는 내용의 이야기를 굉장히 매끄럽게 풀어갑니다.

영화적으로는 무리가 있지만 소설 안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내용이랄까요.

결말까지 완벽했던 <리빙보이 인 뉴욕>의 리뷰를 시작합니다.


 



1. 소설처럼 낭만적인


이 영화는 영화적 현실인 동시에 소설적 내용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토마스가 겪는 상황은 영화 속 사건은 토마스 근처에 사는 제랄드에 의해 소설로 기록됩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소설적인 동시에 영화적인 것이며 한 영화 내에서 소설의 영화화, 영화의 소설화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사실을 영화의 후반부까지 알지 못합니다.

왜 제랄드가 토마스의 아버지나 아버지의 내연녀 조한나에 대해서 그렇게 '전지적'으로 알고 있는지.

왜 제랄드의 전지적인 목소리가 영화 곳곳에 내레이션으로 들어가는지.

그리고 제랄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관객들은 극의 후반부에 토마스가 자신이 제랄드에게 말했던 내용들이 소설로 쓰인 원고를 발견하기 전까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는 한 편의 소설이기 때문에 각각의 인물이나 설정이 낭만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과 약간 동떨어져 있습니다.

낭만적이라는 것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라고 나옵니다.

즉 낭만이라는 것은 현실과 떨어져 나온 것이며 이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영화를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뉴욕은 배경 정도만 쓰이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물들은 상당히 낭만적인 삶의 태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등장인물들의 직업이 모두 예술가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명의 인물만이 낭만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토마스의 아버지 에단입니다. 

에단의 직업은 예술가가 아닙니다. 출판업자죠.

출판업자는 예술가들의 작품의 상품가치를 판단하는 실리적인 직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단은 토마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토마스가 어렸을 적 썼던 글에 대해서 '봐줄 만하다(Serviceable)'며 토마스에게 상처로 기억될 만한 말을 하게 되죠. 

등장인물들의 직업을 통해 그 사람의 특징을 규정하는 것도 일종의 소설적 장치입니다.




2. 두 여인 



토마스 주변에는 두 명의 여인이 있습니다.

한 명은 미미이며 한 명은 조한나입니다.

이 두 여인은 피부색만큼이나 다른 영향을 토마스에게 끼칩니다.

미미는 토마스가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여인이며 토마스를 계속해서 무엇으로 규정하려고 합니다.

미미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토마스 너는 도시 사람 들과 달라. 넌 착한 사람이야."입니다.

즉 미미를 통해 토마스는 착해야 한다는 도시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미미는 친구로서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며 토마스를 괴롭게 합니다.

조한나는 아버지의 내연녀입니다.

미미가 토마스 또래의 여자라면 조한나는 그보다 나이가 들고 노련한 여성입니다.

조한나는 토마스가 사랑하게 '되는' 여인이며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여자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적인 금기를 상징합니다.

조한나를 사랑하는 것은 곧 금기를 어기는 것이며 이 사랑은 미미와의 관계처럼 플라토닉 하지 않고 굉장히 에로스적입니다.

미미를 통해 무엇인가로 규정되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토마스는 조한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지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혹은 한 여인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깨닫는 그런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여인이 모두 자신이 원하던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성장해 가는 인물을 그렸죠.




3. 두 아버지


토마스에게는 또 두 명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한 명은 토마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줄 알고 자랐던 에단입니다.

이 에단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실리적인 인물이며 극 중에서 내연녀와의 관계가 들통나며 토마스와 충돌하는 인물입니다.

또한 예술가가 아니며 예술을 파는 출판업자입니다.

토마스는 어렸을 적부터 에단과 뭔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출판사에 들어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에단은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고 자신의 글의 가치를 몰라주는 전형적인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에 토마스는 실망하고 상처받습니다.

또 한 명의 아버지는 극이 진행되면서 토마스의 생물학적인 아버지로 밝혀지는 제랄드입니다.

제랄드는 처음에는 토마스의 집 근처로 이사 온 굉장히 수상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 낯섦속에서 어떠한 끌림을 느끼게 되고 제랄드에게 미미와 조한나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게 됩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제랄드는 토마스의 생물학적 아버지였고 토마스가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소설 'The Only Boy Living in New York'로 쓰고 있었습니다.

즉 토마스가 제랄드에게 끌렸던 것은 예술에 대한 욕망의 원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글을 파는 아버지와 글을 쓰는 낯선 이웃 중에 토마스의 마음은 후자에게 기웁니다.

이것은 자신의 아버지, 에단에 대한 반작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4. The only boy living in New York


이 영화의 결말이 공개되면서 관객들은 그제야 왜 이 영화의 제목이 <리빙보이 인 뉴욕>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왜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을 원제와 다르게 리빙보이 인 뉴욕으로 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의 영어원제와 소설의 이름은 둘 다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입니다.

The only라는 것은 중요한 수식어입니다.

제랄드에게 있어서 자신의 일부와도 같은 토마스는 그야말로 뉴욕에서 살아있는 '유일한' 소년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강조는 살아있다는 living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이라는 'the only'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랄드를 만나기 전까지 토마스의 삶은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죽어있는 회색빛 삶이었습니다.

제랄드를 만나게 되면서 토마스는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즉 토마스와 제랄드의 상호작용을 통해 토마스와 제랄드는 모두 살 의지와 이유를 찾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버린 뉴욕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소년이 토마스가 되는 것이죠.


작가의 이전글 <수성못>,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휘청거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