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oker Jan 28. 2021

<소울> 목적 같은 건 없다. 그저 살아가면 그뿐

필자는 학원 강사를 나름 오래 해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넌 꿈이 뭐니?"이고 이 질문을 받으면

자신의 꿈은 ~~ 가 되는 것이라며 당당하게 밝히는 학생도 있고 새삼스럽게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학생도 있다.

우리 사회는 꿈이 없는 학생들을 일종의 루저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여기서 꿈은 꼭 직업과 관련이 있어야 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꿈을 찾는 여정"을 강요당한다.

우리 중 대부분은 그러한 사회 안에서 그러한 공교육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정작 성인이 된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 꿈과는 거리가 먼 회색빛이다.

그러한 회색빛의 삶을 살아온 필자에게 힐링 아니, 위로가 되어준 영화가 나왔으니

이번에도 디즈니에서 일을 냈다.

*주의! <소울>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삶의 목적에 대한 인식 변화


<소울>은 굉장히 고전적인 질문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우리는 그 무엇을 '꿈'이라고 부른다.

<소울>에서는 그것을 '목적'이라고 부르고 불꽃(spark)에 비유를 한다.

지구에서 삶을 살고 싶은 영혼들은 모두 최종적으로 마음속에 불꽃이 생겨야만 통행증이 완성이 되고 지구에서 삶을 살아갈 자격을 얻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요리가, 누군가에게는 미술이, 누군가에게는 과학이 그 불꽃이 될 수 있다.

주인공인 조 가드너와 영혼인 22 역시 처음에 그 불꽃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의 전당'에서 이것저것 시험을 해본다.

모든 것의 전당에서 22의 불꽃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조

이 단계에서 관객과 조는 불꽃이라는 것이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보통의 매체에서 꿈을 다루는 방식이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고 우리 역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영화의 반전이자 클라이맥스이자 주제이다.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중학교 음악 선생님이 되어 의욕 없는 학생들을 가르치던 조는 자신의 삶의 목적유명 재즈 바에서 연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내에서 조는 문자 그대로 그 목적만을 위해 다시 생을 얻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막상 그 목적을 성취하고 나자 그것 또한 지루한 일상이 될 것임을 알게 된다.

목표를 위해 달리고 그것을 성취한 뒤에 찾아오는 허무함과 그 목표가 일상이 됐을 때의 매너리즘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겪어봤던 것이다.


2. 삶 = Jazzing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내놓는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 답은 재즈이다.

음악의 장르로서의 재즈를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 영화에서 22는 명사인 Jazz를 동사로 사용하여 Jazzing이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낸다.

Jazz는 즉흥 연주를 중요시하는 음악의 장르이다.

그것에 비춰 생각해볼 때 22가 말하고 싶었던 Jazzing 역시 즉흥적인 것 즉 그때 그때의 순간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거창한 교향곡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 순간순간을 그저 거대한 하나의 곡을 위한 음표 정도로 생각하고 매일을 살아간다.

그 음표들이 모여 정해진 어떤 것으로 향할 것이라 믿으며 매일매일 그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회색빛 지하철에 탄 사람들로 대표된다.

순간의 아름다운 것을 등진 현대인 그리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22

거대한 하나의 목적을 위한다고 믿으며 순간의 즐거움을 등진 사람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음표 하나하나를 즐기라고 말한다.

우리의 인생은 거창한 교향곡이 아니며 그때 그때의 음표를 즐기며 더 나아가 내가 즉석에서 음표를 써 내려가는 마치 재즈와 같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때 그때의 삶에서의 경험 즉 살아있음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실존하는지도 모르는 삶의 목적을 무조건 좇는 현대인들에게 위로가 된다.

인생은 거창한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 아니며 살아가려는 의지 그것만으로도 삶의 목적은 충분하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이것을 깨달은 조는 진정한 Jazz를 할 수 있게 된다.


3. 교육적 함의

<소울>은 또한 적잖은 교육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장르적으로는 버디 무비이지만 어른인 조가 아직 인생을 살아보지 않은 22의 멘토가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조를 포함한 다른 멘토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22에게 삶의 목적을 찾아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한 22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너 같은 애는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없어." "너는 문제아야." "네가 찾은 그것은 삶의 목적이 아니야." "너는 나 없이는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없어."

흑화 했던 22 안에서 거대한 그림자로 묘사되는 그것들은 현실에서 꿈이 없다는 아이들에게 혹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꿈을 가진 아이들에게 윽박을 지르는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22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비록 조의 몸 안에서이지만) 실제 삶을 살아보면서 찾게 된다.

사실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설사 그것이 부모라 할지라도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아낼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려야 하는 우리의 인생은 또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이 영화는 타인에 의해 꿈과 삶의 목적을 종용당하며 컸던 우리 성인들을 위로해주는 영화인 동시에

앞으로 커 갈 아이들에게 꿈을 종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영화인 것이다.



모든 것을 떠나서 힐링을 넘어서 위로까지 받을 수 있는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또 한 편 나왔다는 것에 감사한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점을 고려할 때 삶 자체에 대한 고찰이 담긴 이러한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이 정말로 사랑스럽다.

필자는 여태까지 최고의 애니메이션은 <인사이드 아웃>을 뽑았는데 <소울>을 다시 보면 그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아버지의 핏빛 기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