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푸념꾼의 네 번째 푸념 <부산행>, <서울역>
영화 <부산행>의 프리퀄로 알려진 <서울역>.
개봉하기 전 부터 두 영화가 프리퀄, 시퀄 관계인 것을 연상호 감독이 밝힌 바 있고 <부산행>이 흥행에 성공함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서울역>으로 대중들의 시선이 옮겨왔지.
아 여기서 잠깐 프리퀄이 뭔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간단히 설명해주자면
영화에서 이야기의 진행이 전편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이야기를 다룰 때 이를 프리퀄이라고 하는거야.
그러니까 부산행에서 왜 그 난리가 났는지 설명해주는 기능을 한다 이 얘기야.
이번 푸념에서는 <서울역>에 드러나는 공간의 이면성에 대해서 쓸까해.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서울역>이라는 영화의 작품성 부터 평가해보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평가가 그렇게 좋지 않아.
우선 관객들은 국내 애니메이션 영화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봐야 뽀로로 같은 3D로 된 것들을 주로 봤지 <서울역>처럼 2D로 된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 사람을 거의 드물거야.
항상 매끈매끈하게 다듬어진 미국의 코믹스나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만을 보다보니 <서울역>의 시작과 동시에 많은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거지.
나 역시도 제작년에 있었던 KAFA 필름 페스티벌에서 상영한 <화산고래>라는 작품을 보고 엄청나게 실망했으니까.
아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은 이것 밖에 안되나... 싶은거지.
성우랑 그림도 따로 노는것 같고 무엇보다 모션이 너무 어색해.
하지만 그건 기술력의 차이이니까 낯설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어도 그걸 가지고 영화 자체를 깎아내려서는 안돼.
그건 마치 헐리웃 영화의 CG와 우리나라 영화의 CG를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기술만 취약한게 아니라는 점이야.
이 영화는 사실 프리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어.
프리퀄이라는 것은 이 전편에 있었던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혹은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야해.
하지만 이 영화는 왜 대한민국이 좀비밭이 됐는지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찾을 수 없지.
<서울역>도 그저 한 할아버지가 무엇인가에 물려 감염되어 서울역 주변부터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것만 공개 될 뿐이야.
이 바이러스가 어디서 왜 발생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부산행>을 그저 서울역으로 옮겨와서 도돌이표처럼 비슷한 사건을 보여줄 뿐 어떠한 영화적 진전이 없게되는거야.
게다가 문제는 또 있어.
이 영화는 프리퀄이라고 하기에는 좀비에 대한 기본적인 설정조차 공유하고 있지 않아.
<부산행>에 공개됐던 좀비들의 특징 기억하고 있어?
좀비들은 사람을 '볼 때'만 공격하려고 하기 때문에 열차의 승객들은 문을 소화기나 신문지로 가려놓지.
그리고 그들은 청각이 발달한 대신에 시각이 좋지 않기 때문에 주변이 어두워지면 소리로만 주변을 탐지해.
이 두가지 특징은 <부산행>에서 좀비들을 타파할 때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설정이야.
하지만 <서울역>에서는 이러한 특징들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
좀비가 쫓아와서 화장실문을 닫았는데 화장실 문을 계속해서 들이받질 않나.
오밤중인데도 좀비들은 아주 잘 돌아다니까지 하니 이정도면 설정붕괴도 이런 설정붕괴가 없지.
이렇게 되면 두 영화가 거의 독립적인 영화로 봐도 무방해지는 경지에 오르게 되는거지.
사실 <부산행>과 <서울역>의 유일한 끄나풀은 <서울역>의 여주인공 혜선이야.
<부산행>에서 석우와 수안이 타고 있는 KTX에 올라탔던 최초 감염자 소녀를 기억해?
이 역할을 배우 심은경이 맡았는데 <서울역>의 혜선 역할의 더빙도 심은경이 맡았어.
그렇다면 두 인물사이에 어떠한 연관관계가 있다는건데.
다들 눈치챘겠지만 <부산행>의 이 소녀가 바로 혜선이야.
바로 이 인물 때문에 <서울역>이 <부산행>의 프리퀄이 되는건데.
이 지점도 사실 매우 허술해.
우선 <서울역>의 결말 부분에서 혜선이는 완전히 좀비로 변했다고 나오는데 <부산행>에서는 아직 완전히 감염이 진행된 상태가 아니야.
적어도 옷이라도 비슷한 옷을 입히는 성의를 보여줘야되는데 보시다시피 옷도 전혀 다르지.
<서울역>의 가장 짜증나는 점은 바로 캐릭터들에 있지.
물론 굉장히 절망적이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너무나 자주 '울어'.
남자고 여자고 노인이고 어린아이고 할 것 없이 영화내내 질질 짜다보니 그것을 보는 관객들도 그저 답답해지지.
대중적인 재미가 있는 영화도 아니고 좀비들 역시 편리한 영화적 장치 정도로 쓰여.
종합해보면 이 영화 자체는 그렇게 훌륭한 영화가 아니야.
만약 <부산행>을 좋게 봤다면 그냥 <부산행>의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이 영화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연상호 감독의 특징 답게 이 영화에도 주목해야할 메세지들이 몇개가 있지.
난 그중에서도 '공간'에 주안점을 맞춰봤어.
달리는 KTX는 밀폐된 공간이지만 <서울역>은 개방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두 영화가 달랐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이제 그것에 대해 푸념해볼까.
우선 서울역이라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자.
서울역의 첫 느낌은 어때?
역이라는 것은 만남과 이별의 공간이자 설렘의 공간이기도 하지.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니까.
보통 서울역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어느정도의 기대를 하고 있다고 봐.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울역 '안'의 이야기야.
<서울역>은 서울역의 변두리 혹은 '밖'의 이야기지.
안에서 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설렘을 안고 떠나지만 밖에 있는 노숙자들에게 있어 역은 정체된 생존의 공간이야.
더더군다나 연상호 감독은 그 특유의 인장을 노숙자들에게도 새겨놨는데 노숙자들 사이에서도 갑을 관계가 있다는 설정이 그것이지.
을에 해당하는 노숙자는 아파도 쉼터에 가지 못하고 역에서 처량하게 좀비로 변해.
생존에서 실패한 노숙자가 좀비로 변해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과 노숙자를 공격하는 것은 아이러니하지.
노숙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에 있는 오피스텔 광고와 그 광고 뒤에서 담요를 꺼내는 노숙자의 모습 역시 아이러니를 표현한 장면이야.
경찰서 역시 마찬가지야.
영화내에서 경찰들은 혜선이와 노숙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다가 결국 유치장에 갇혀버려.
범인을 쫓아야 될 경찰들이 역으로 철창에 갇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폐를 끼치게 되지.
이것 역시 아이러니.
지하철 역시 원래는 스크린도어 뒤에 있어야 할 것은 사람이지.
하지만 <서울역>에서는 이 장면과 같이 오히려 사람이 철로 쪽에 있고 좀비들이 스크린 도어 쪽에 있어.
이것 역시 원래 있어야 할 곳이 반전된 것이지.
<서울역>의 최종 종착지는 모델하우스야.
모델하우스 라는 공간은 그럴듯하게 꾸며진 집이야.
실제로 살 수 있는 가정집처럼 모든것이 꾸며져있지만 사실상 아무 기능도 할 수 없는 공간이지.
연상호 감독은 이를 통해서 이 사회의 역설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아.
이 사회 역시 그럴듯하게 꾸며진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이지.
그리고 이 가짜의 공간에서 혜선이에 대한 진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 역시 역설이야.
좀비를 피해 들어온 곳에서 오히려 죽고 죽이게 되는 역설을 보여주며 이 영화는 막을 내려.
이 마지막 장면은 마치 <부산행>에서 안전했던 마지막 칸의 문을 열려고하자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겹쳐 보이며 역시 사람이 제일 무섭다라는 장면을 실감하게 해줬지.
이렇게 <서울역>은 역설적인 공간들로 가득차있어.
이 역설들은 모두 생존과 관련되어 있지.
하지만 <서울역>에서의 생존은 <부산행>에서의 생존과 그 궤가 달라.
좀비가 없었을 때 <부산행>에서 석우의 생존은 돈벌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지만 <서울역>에서 노숙자와 혜선의의 생존은 포기하면 정말 죽게되는 목숨줄을 놓고 벌이는 생존이야.
그 생존을 위한 공간들이 좀비로 인해 그 모순을 드러내고 그 모순이 서울역- 서울 - 우리나라 전체로 확산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가 <서울역>이야.
<서울역> 내에서는 서울만이 그 모순 폭로의 대상이 되지.
서울이 모순덩어리로 가득하니 다른 공간으로 떠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지.
역설의 끄나풀인 혜선이가 KTX에 타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진행하며 우리나라 전체에 대한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부산행>이 되는 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