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푸념꾼의 세 번째 푸념 <마션><부산행><더 테러 라이브><터널>
'헬조선'이라는 말 많이들 들어봤지?
디씨인사이드의 역사갤러리에서 제일 먼저 사용했다고 하는 헬조선은 대한민국이 지옥과도 같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야.
얼마나 살기가 텁텁하면 자기가 밟고 있는 땅을 지옥이라고 까지 표현할까.
이번에 영화 <터널> 역시 헬조선에 살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지.
영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레퍼런스들이 생각이 나더라고.
최근에 개봉한 영화 <부산행>, 하정우 생존을 위해 벌인 또 다른 투쟁 <더 테러 라이브> 그리고 화성에서 살아남은 남자를 그린 <마션>까지.
오늘은 <터널>과 이 세 영화를 비교하면서 진짜 헬조선에서 살아남는 남정네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또 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한 푸념을 좀 늘어놓을까 해.
<마션>은 제일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선 세 영화들을 살펴볼까.
세 영화에서 남주들의 직업 기억나?
<더 테러 라이브>에서 윤영화는 아나운서에서 밀려나서 하릴없이 라디오 DJ를 하고 있었고 <터널>에서 정수는 자동차 딜러로 <부산행>에서 석우는 펀드 매니저였지.
모두 특별할 것 없는 직업들이고 나름 풍족하게 살아가는 직업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마 이들의 직업을 통해 대한민국 아빠들의 가장 흔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이 남정네들의 비슷한 구석이 직업뿐이 아니라는 거지.
비슷한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가족관계야.
윤영화는 아내와 이혼 상태에 있어.
그는 특종을 잡아 다시 한번 재기를 노리면서 동시에 아내와 재혼을 같이 꾀하지.
석우는 아내와 별거 중이고 엄마를 보고 싶다는 딸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가다가 봉변을 당하지.
정수는 아내와 크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실이 그렇게 좋은 부부도 아니야.
물론 사고가 일어난 후에는 말이 달라지지만.
만약 윤영화, 정수, 석우를 우리나라 대표 아빠라고 본다면 이 가족관계에서 오는 소원함 역시 대한민국 가장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네.
하. 지. 만. 가족이란 게 원래 물어뜯고 싸우다가도 사건이 터지면 똘똘 뭉치는 거 아니겠어.
다들 무심해 보이지만 속으로 자기 여자를 엄청 챙기는 상남자들이라고.
윤영화는 자신의 아내인 이지수가 사건 현장으로 직접가 중계를 하다가 인질이 되자 분노를 토하고 정수 역시 바깥에 있는 아내 세현에게 의지를 많이 하게 되지.
석우 역시 사건이 터지자 아내에게 전화 한 통하는 센스를 놓치지 않는 남자야.
자기들의 여자들만큼이나 이들이 놓지 못하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핸드폰이야.
우연히도 이 세 영화의 주인공들 모두에게 핸드폰 = 목숨줄 이야.
윤영화는 범인이 언제 줄지 모르는 전화를 기다리기 때문이고 나머지 두 사람에게는 바깥과 통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지.
그렇다고는 해도 이 핸드폰에 걸려온 통화 하나로 생사가 결정되는 판국이니 목숨줄일 뿐만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어.
실제로 <부산행>에서는 핸드폰이 연락수단으로만 쓰이지 않고 좀비들을 타파할 수 있는 도구로도 톡톡히 활약하니 비유적인 표현으로 목숨줄인 것만도 아니라고.
그런데 이 전화라는 게 비단 극한적 상황에 처해있는 이 사람들에게만 희망이자 목숨줄일까?
아니야.
우리는 어때?
카톡 하나에 울고불고하는 우리 모습.
전화 한 통에 당락이 결정되는 우리 모습은 사실 영화 내 인물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봐.
우리들도 우리들의 목숨을 핸드폰에 담보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지.
영화에서는 우리가 아주 익숙히 알고 있는 장소에서 사건이 일어나.
<더 테러 라이브>에서는 마포대교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터널>에서는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터널이 붕괴되고 <부산행>에서는 KTX 안에서 참사가 일어나지.
<터널>에서 뉴스 앵커가 "대한민국의 안전이 또다시 무너졌습니다. 이번에는 터널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마치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지 않아?
아까 인물들을 가장 보통의 존재로 설정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그들이 있는 장소 역시 흔한 장소여야 돼.
대한민국 아빠들이 갑자기 우주선에 타고 있어서야 말이 안 되니까.
하지만 그 '흔한 장소'에서 흔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리고 그 흔하지 않은 사건을 흔하디 흔한 인물들이 겪어야 한다면.
거기서 오는 괴리가 영화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는 거지.
그리고 평범한 인물과 흔한 장소는 스크린 밖의 관객들이 영화 안의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는데 도움을 주고 마침내는 영화의 궁극적인 질문을 스크린 밖으로 뽑아내는 데 기여하게 되지.
자 지금부터 헬조선의 면모가 나온다고.
그래 어느 사회에서나 문제는 발생할 수 있어.
그 문제들이 영화에서와 같이 극단적이지 않다고는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을 통해 그 사회의 성숙함이 결정되는 거야.
하지만 영화 내에서 그려진 우리나라의 문제 해결 방식은 아주 빵점짜리라고.
영화에서 그려지는 우리나라의 문제법은 항상 일관되어 있어.
일단 사건이 터지는 것을 은폐하려고 하지.
하지만 곧 언론이 귀신같이 이를 알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자신들이 국민들의 알 권리와 정의를 대변한다는 듯 국가에게 빠른 해결을 요구하는 척하면서 자극적인 기사로 시청률 전쟁을 벌이고.
그리고 나면 흔히 권위자란 것들이 나와서 최선을 다한답시고 저울질을 시작해.
그 저울질에는 한 사람의 인권이나 존엄성 따위는 없고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까 혹은 손해가 되지 않을까.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칠까에 대한 생각밖에 없지.
그 저울질 덕분에 피해자는 더욱 속출하고 문제는 오히려 악화돼.
그래 이건 영화라서 그런 거야 진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안 그러겠지 하고 싶어도 생각나는 사건이 하나 있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멘트인가 했지.
국가에게 버려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포기, 절망, 좌절 그 끝엔 항상 생존이 있어.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지했던 사람들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살아나갈 길을 찾아.
이때 이 생존은 어떠한 목적도 가지지 않는 순수한 삶에 대한 갈구라고 할 수 있어.
흔들렸던 사람들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굳건해질 때 그들은 마침내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지.
국가에 의해 버려진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려는 그들의 발버둥은 언제나 감동적이야.
그러나 이는 영화니까 가능한 거겠지.
실제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흔들린 눈동자를 한 채 국가에게 대중들에게 외면받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지.
테러, 터널, 좀비는 다름 아닌 이러한 사회적 현상의 은유라고도 할 수 있지.
비단 이러한 문제를 국가의 탓으로 돌릴 것만은 아니야.
당신은 터널에 갇힌 사람 한 명과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저울질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아니면 좀비들 사이에서 뛰어오는 단 한 명을 위해 문을 열어줄 용기가 있어?
너무 절망적이었나.
하지만 언제나 희망은 있어.
<마션>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지.
나는 우리나라는 헬조선이고 외국은 낙원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야.
단지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의 차이가 극명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희망을 상징하는 영화로 꼽은 거지.
<마션>에는 어떠한 저울질도 등장하지 않아.
한 명의 목숨과 천문학적 예산 그리고 다른 팀원들의 목숨들 사이에서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한 명의 목숨을 구하자고 힘을 모으는 영화가 <마션>이야.
국가도 대중도 개인을 잊지 않고 개인 역시 살기 위해 필사를 다하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지.
<마션>에서도 실패와 좌절이 몇 번씩이나 등장해.
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사회적 차원 혹은 전 국가적 차원에서 연대해 해결해 나가는 모습
그 시도 자체가 아주 값지다고 생각해.
자신을 구하려는 필사의 시도를 알게 된 마크는 계획이 지연됐다는 것을 알자 죽음을 직감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지.
하지만 그 모습은 위의 세 주인공들의 절망과는 느낌이 달라.
좌절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깝고 감정선 역시 요동치지 않지.
터널에서 구조대장인 대경이 하는 말
"잊고 계신 것 같은 데 저 아래에 있는 사람은 사람입니다"
우리 가끔씩 까먹고 있는 게 아닐까.
맨날 뉴스에서 끔찍한 소리만 전해져 오니까 우리 너무 무감각해져 버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