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몸 쓰는 일을 주로 한다. 몸을 쓰면 의지와 별개로 머리가 빈다. 머리를 비워야 일이 수월하다. 힘들다고 몸이 말을 건다. 입천장이 갈라져서야 몸의 말이 들린다.
당이 땡긴다. 믹스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달다. 하지만 쓰디쓰게 느껴진다. 지금 시점 나를 찾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치열하게 일탈을 도모하던 어린 날처럼 무엇인가 달라질까? 아직 질변의 여지가 있는 것일까?
고통은 들러붙어 피부가 되었다. 고통의 짐이 찌르듯 버겁다. 입술을 다문채 아무렇지 않게, 치열해서 너무나 지루한 것들 안에 갇혔다. 생살이 벗겨지는 아픔을 견딘다. 짐을 남기고 갈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의미가 있든 없든 그다지 별로다. 어차피 도모할 것이다.
어떤 헤어짐이든 나의 뒷모습이 미웠다
헤어짐을 헤아려 본다. 헤아려 본 헤어짐은 횟수가 아닌 감정이고 이입이다. 주사를 맞듯 아프기만 했다. 반항 없이 받아들였다. 아픔을 감내하는 것은 오른손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오래된 익숙함이다. 왜 아플까를 생각해본 기억이 없다.
너도 아플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닫게 된 지 오래지 않다. 먼저 다가가고 아파하는 것은 나였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익숙했고 편했다. 그렇게 느끼며 자랐다.
이별에 대한 무언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어떤 헤어짐이든 나의 뒷모습이 미웠다. 직시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눈을 부릅뜨고 헤어짐을 직시해야 이해되었다. 뒷모습을 보이면, 아픔 그 이상으로 가슴이 찢어졌다. 이유가 있으니 나를 이해한다. 이해 뒤에는 안도감이 따라왔다. 나는 이상한 놈이 아니구나.
최초의 헤어짐은 느닷없었다. 11살이었다. 전학 절차를 위해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왔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다음날 내려가셔야 했다. 내 손에 오천 원을 쥐여주며 말씀하셨다. 내 눈을 한참 바라보신 것 같다.
“우리 아들, 00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작은 문으로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덩그러니, 그 부사 외 모든 형용이 죽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를 본다. 5분쯤 지났을까. 독약을 삼킨 것 같다. 둘러싼 공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옥죄기 시작한 공기는 덩어리로 뭉쳤다. 날카로운 덩어리는 피부를 찔렀다. 눈 밑이 뜨거워 호흡할 수 없었다.
어렸지만 본능적으로 뛰쳐나갔다. 아이였으나 숨죽여 울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첫 헤어짐이었다. 낯선 헤어짐의 정서적 반응은 아이답지 않았다. 그 후 오랜 시간 울지 않았다.
헤어짐의 원칙만 중얼거렸다.
엄마와 함께 시골 터미널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엄마와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입대하는 것은 별로였다. 의무 따위 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신검 때 방위 판정을 현역으로 바꾼 분이다. 놀랍지만 가능했던 시절이다. “다녀올게.” 마실 가는 것처럼 엄마에게 말했다.
아무 말하지 않으신 것 같다. 버스가 모퉁이를 꺾어 도로에 섰다.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 깨달았다. 두 번째 헤어짐이란 것을. 10여 년을 참아낸 눈물이 댐이 터지듯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울어본 적은 처음이다. 춘천 가는 내내 울었다. 누구에게도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헤어짐이라면.
사람을 만나며 적지 않은 헤어짐을 겪는다. 아픔이 있고 생채기가 났지만 내 몫이었다. 고통이 내 몫인 것이 편했다. 선택이라면 차이는 쪽을 원했다. 멋있게 이별을 고해야 하는 상황에도 차이고 싶었다. 아픔을 줄여야 했다. 그런데도 헤어짐에 나의 뒷모습은 없었다. 해석할 수 없는 원칙이었다.
오랜만의 헤어짐을 겪었다. 시간의 흔적이랄까, 감정선의 헤어짐이란 것이 백 년만이라 얼떨떨했다. 도대체 정의되지 않았다. 몰입하면 터질 것 같아 동공을 흔들었다. 헤어짐의 원칙만 중얼거렸다. 헤어짐 대신 2호선 아현역이 덩그러니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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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며 생각한다. 문장은 어쩌면 유언일 수 있겠다. 목숨이 다할 때 남기는 것이 유언이라는 것은 오류일지 모른다. 나를 남기는 것이 유언일 수 있다. 해석이 다르던, 유언이란 말은 비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