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후기

by Moon

참 진도 안 나가는 책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 읽어버렸다. 진도가 안 나갔던 건 단점이 많아서이고, 어느 순간 다 읽어버린 건 그럼에도 스토리가 끌어가는 힘이 거셌기 때문이다. 시간이 난다면 다시 읽어볼 생각이 들까? 강력한 스토리라는 장점은 완독한 시점에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않을 테고, 세세한 단점들은 작가가 개정판을 내지 않는 한 변함없이 단점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에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가장 큰 단점은 ‘오그라드는’ 대화체다. 진부한 소년 만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가 모든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나온다. 특히 핵심 인물 세 명이 대화할 때면 늘 그런 식이라 나도 모르게 속독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얼마 전 읽었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라는 일본 소설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설마 최근 일본 문단의 흐름인 걸까? 딱 두 권 읽은 거라 결론을 내리기 애매한데,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일본 소설 집어 들기 망설여질 듯하다. 요즘 한국 소설 속 인물들은 누가 됐든 무슨 배경을 가졌든 죄다 시인처럼 말해서 몰입이 되지 않는데(캐릭터 이름만 달라지지 그저 작가 자신들...), 일본 소설은 또 이런 특징이 있구나, 싶었다. 극복 못하고 책 포기하는 사람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야기 자체에는 몰입이 된다. 나는 중년 아저씨 주제에 청춘 감성 로맨스물에 은근 약한 타입인데, 그래서 일수도 있고, 이 소설이 사랑으로부터 파생되는 소망이라는 개념을 묘사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분명히 고등학생들 사랑 이야기인데, 나는 자꾸만 희귀병을 앓고 있는 우리 막내가 생각났다. 나에게 그 누구보다 소망이 가진 힘을 가장 실질적으로 가르쳐준 소중한 존재, 그 녀석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어른거렸다.


이 책을 검색포털에서 찾아보면 어떤 소개글을 읽어도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는 단어가 강조되는 걸 알 수 있다. 그게 핵심 설정이다. 자고 일어나면 그 전날의 기억을 모두 잃는 여자아이와, 그 여자아이의 남자친구 이야기. 아담 샌들러와 드류 베리모어의 ‘첫 키스만 50번째’의 그것과 판박이다.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첫 키스 영화를 본 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다. 파릇하고, 파릇해서 시야가 좁던 20대였다. ‘오늘 밤...’을 다 읽었을 때 나는 조금 더 넓게 볼 줄 아는 아저씨였다. 그게 결정적 차이였을까.


책을 읽으며 보였던 건 기억 상실증을 극복하려는 청소년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사랑에 기반한 소망’이었다. 남자아이가 기억 상실증에 걸린 여자 친구의 미래를 미리 준비시키는 것, 그것도 ‘미래를 준비시킨다’는 자각 없이, 그저 매일을 좋은 기억으로 채워주기에 여념이 없었을 뿐인데, 그것이 어느덧 그 여자아이의 미래가 되어간다는 이야기의 흐름은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상세한 설명을 하지 못함을 양해하시길.


보통 ‘소망’이라고 하면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기대’ 정도로 이해한다. 그 ‘기대’가 이뤄질 거라는 마음이 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상태를 두고 ‘믿음’이라고 하기도 하고, 반대의 상황을 맞닥트렸을 때 느끼는 걸 ‘실망’이라고 하기도 한다. 지레 반대의 상황이 될까 겁먹는 걸 ‘포기’내지 ‘두려움’이라고 하며, 현실성이 전혀 없는 ‘믿음’을 ‘맹목적’이라고 수식한다. 이 정도가 ‘소망’이라는 단어가 구성하고 있는 인식의 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소망이 접혔을 때의 실망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뭔가를 바랄 때 두려움을 삼키고 또 삼킨다. 그러다가 그 두려움에 오히려 내가 삼킴을 당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랬기 때문에, 어느 순간 나는 기대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게 됐다. 사람에 대해서도, 상황에 대해서도, 일이 풀려가는 방향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데 익숙해졌다. 오죽했으면 우리 아이들까지도 이걸 알아채 ‘아빠는 기대를 하지 않잖아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기대하지 않으므로 실망할 일도 없고, 따라서 화와 절망의 낙폭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이건 장점이다.


뒤늦게 알아챘는데, 기대가 없는 삶에는 의견도 없었다. 나는 기대만 삭제한 게 아니라 의견도 꽤나 지운 채 살고 있었다. 물론 뇌라는 게 있으니 의견이 아예 거세된 건 아니다. 다만 표현하지 않을 뿐이었다. 내 생각과 반대되는 안이 채택되는 상황이라도, 나는 이 바보 같은 무리들이 어차피 이런 바보 같은 결정을 할 줄 알았고, 현명한 길을 선택하리라는 걸 전혀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그냥 따랐다. 다 같이 죽으면 그만이니까, 라는 생각이었다. 나와 같은 의견으로 상황이 전개돼도, 이러다 전복되겠지, 싶어 그냥 따라갔다. 다 같이 엎어져 죽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했다기보다, 내가 보기에 세상 모든 길과 결정은 실패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다. 이건 단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만사 우울한 사람인 건 아니다. 그냥 마음속에 뿌리 깊은 음흉함과 무력감이 감춰져 있었다, 뭐 그런 얘기일 뿐이다.)


그러다가 막내가 우리에게 왔다. 그 아이는 세계에 200명도 걸리지 않은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병원을 오가고 온갖 치료 시설들을 드나들며 몇 년 살았다. 10년에 10만 킬로미터도 운전하지 않는 우리 가족은, 1년에 3만 킬로 이상을 뛰며 3~4년을 살았다. 그러는 사이 우리 가족 안에 ‘소망’이 싹텄다. 여기서 ‘소망’을 갑자기 등장시키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혹시 아이가 많이 호전됐나,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됐나, 의사들로부터 좋은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나, 등등 아닐까? 아니다. 물론 아이는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 있으나, 그게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를 잡은 ‘소망’의 정체는 아니다. 사실 아직 나도 그것의 이름이 ‘소망’이라는 것 외에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던 ‘기대’ 등과 너무 달라서.


중년 이상 나이를 먹고, 살만큼 살아왔기에 세상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된 나는, 우리 아이가 의학적으로 호전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는 ‘이 아이는 잘 커서 어엿한 성인이 될 거야’라는 소망이 굳건하다. 심지어 어떤 날은 그 소망이 ‘장애를 극복할 거야’라든가 ‘정상인이 될 거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런 소망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잘 아는데, 그것과 내 소망은 전혀 다른 공간에 있어 겹치지 않는 것처럼 나라는 인간의 한 마음속에서 서로를 거스르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방해 없이 공존하는, 그러나 사실은 상충하는 두 개의 생각을 난 어떻게 설명할지 한참을 몰랐다.


그러다가 ‘오늘 밤...’을 읽게 된 건데, 그러다가 알게 됐다. 소망이 깊은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올 때면, 그 소망은 성취여부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된다는 걸. 그러니까, 소망의 다른 이름은 ‘기대’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사랑하면 소망하게 되는 거다. ‘소망’이 ‘기대’와 비슷한 것이면 당연히 그 소망은 두려움이나 실망을 수반하거나, 성취된 후에야 기쁨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그 ‘소망’이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면, 아니, 사랑 그 자체이면, 성취가 되기도 전에 이미 기쁘고 충만하다. 그 충만함이 얼마나 충실한지, 사실 성취가 되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음을 난 이미 느끼고 있다. 그러니 두려움이나 실망의 자리가 남아있지 않다. 아이가 의학적으로 완쾌되든 이대로 생을 마무리 하든, 그것이 내 소망을 좌지우지 못한다. 그 소망은 사랑이니까. 사랑이 나도 모르게 소망으로 이어진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내 얄팍한 기대나 현실감각과 전혀 별개의 것이니까.


사랑에 기반한 소망은, 그 소망이 성취되는 것 이상의 믿음을 마음에 심는다, 고 나는 막내에게서 배웠다. 난 지금도 그 아이의 완치를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완치라는 목적이 내 인생의 거대한 나침반이 되어서가 아니다. 실제로 완치가 되든 안 되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아이에 대한 내 사랑이, 현실의 한계라는 개념을 초월함으로써, 소망이 이미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기쁨을 그 소망 자체에서 느끼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다. 내 모든 기관과 세포가 그 아이와 연결돼 있는 듯 기뻐 춤을 추는데, 나나 그 아이나 이미 치료된 거나 뭐가 다를까.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한참을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의 기적이고 동력일 될 것이다. 그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도 이미 완치됐다, 나는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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