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의 낭만
봄바람이란 이름이 주는 느낌이 무색할 정도로 대기가 휘몰아치고 있다. 어제는 볕이 허락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와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더니 오늘은 바람이 숫제 창문을 뽑으려 한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엔 피가 굳는다. 내 안에 담긴, 갖기 싫은 바람 빛깔 유전자를 미리미리 진정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평생 그 핏속 가득한 바람의 기운을 가두지 못했다. 한 자리에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었다. 한 직장에서 진득하게 일을 하지도 못했고, 집에 있어도 나갈 궁리만 했다. 기분이 좋으면 거리에서 춤을 추고 다녔고, 언짢으면 집안 화분들이 깨졌다. 젊은 날 종교에 몸 담으면서 그 바람은 멎은 것 같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요동치는 삶으로 돌아갔다. 신앙도, 심지어 가족도 움킬 수 없었던 그 바람을 하긴 아버지 혼자 어찌 잡았으랴 싶다.
이리저리 휘몰아쳤던 아버지는 그러나 나이에 덜미를 잡히셨다. 그리고 이제 어느 작은 옥탑방에서 홀로 젊은 날의 풍속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런 아버지가 있는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버지는 특식이라며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식빵 두 쪽을 구워 한쪽에는 딸기잼을 바르고 다른 한쪽엔 땅콩잼을 발랐다. 브루스타를 켜고 달걀을 깼다. 어디서 봤는지 프라이가 따끈따끈할 때 치즈 한 장을 얹어 살짝 녹이고는 두 빵 사이에 넣었다. 삼십 년을 다 채워서야 드디어 꼬리 잡은 바람의 맛은 나에게 너무 뻑뻑해 목이 다 멨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했고, 우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서로의 자리를 빈 채로 남겨뒀다.
평생이 바람이라 남은 건 먼지뿐인 아버지는 상견례 자리에도 나오질 않았다. 결혼식장에 나오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아들 결혼이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장모님은 상처를 받으셨다. 그게 아닌데, 누가 봐도 딸이 거절당하는 그림이었다. 상견례 자리에 홀로 나온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나와 어머니는 식장에 아버지가 있을 거라고, 우리 스스로도 불안한 약속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결혼식 당일에 가장 일찍 식장에 나왔다. 빌려 입고 온 양복은 얇고 남루했다. 솔직히 아버지를 한쪽으로 치워두고 싶었다. 옷차림보다 아버지 안에 지금 어떤 바람이 불고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춤이라도 추는 건 아닐까. 술이라도 과하게 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생전 처음 사돈집 식구들과 인사를 하실 땐, 놀랍게도 보통의 아버지가 되었다.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손님들에게 인사하고, 가족사진 촬영도 마다하지 않았다. 연기일지라도 고마웠다.
그러나 연기는 완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식 내내 나를 피하고 있었다. 폐백실에서도 별 말이 없었다. 당연하지만 어머니와도 어색했다. 두 사람은 눈길 둘 곳이 없어 막 며느리가 된 아내만 쳐다보고 있었고, 그 광경을 나는 조용히 주시했다. 가족이지만 가족인척 연기해야 하는 그 분위기를 나만 위태롭게 느끼고 있기를 바랐다.
그 바람대로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다. 신혼여행을 바로 떠나야 했으므로, 그리고 그 위태로운 어색함을 일초라도 빨리 탈출하기 위해, 서둘러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식장을 나섰다. 그때 큰 고모가 뒤로 와서 내 손에 봉지를 쥐어주셨다. 여자 바지 하나와 삼십만 원이었다.
"니 마누라 편하게 입으라고 하나 만들어왔다. 그라고 이건 느그 아빠가 주라카드라. 줄 게 이거밖에 없다고 니한테 챙피해서 몬주겠다드라."
슬쩍 아버지 쪽을 쳐다봤지만, 아버지는 아예 멀찍이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나도 등을 돌린 채 차에 올랐다. 그쪽으로 다시 고개 돌릴 자신이 없었다.
식장을 떠나 한창 운전을 하고 달리는데, 사촌형한테 전화가 왔다. 아까 그 고모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한 잔 하고 있다며, 잘 갔다 오라고 했다. 술기운에 용기가 난 것일까, 불안한 시선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였을까, 아버지가 전화기 저편에서 바꿔달라고 했다. 전화기를 건네받는 소리가 났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먼저 말했다.
"갔다 올게요."
"... 미안하다."
"왜 그래 또."
"...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
마침 발음이 심하게 꼬여서 난 못 들은 척했다.
"갔다 올게. 술 적당히 하고."
전화를 끊고 고속도로에서 창문을 열고 속도를 올렸다. 바람에 눈이 따가웠다. 오늘은 기쁜 날이어야 했다. 여러 모로.
15년이 지났지만 바람이 오늘처럼 방 창문을 흔들면, 그날 고속도로에서 들었던 바람소리가 들린다. 다행히 내 안의 돛은 아버지의 거셌던 바람으로 인해 진작 찢어진 상태다. 게다가 그의 죄스러웠던 그 30만 원이 그 때나 지금이나 묵직한 닻이 되어 날 내 자리에 정착시키고 있다. 다만 미안하다는 그때의 그 말에 나는 아직 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눈 따갑게 기억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