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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구석구석 아시는 하나님

by Moon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훈련에 돌입하고서 1주일이 지나고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는 자잘하게 쌓이지만, 이렇다 할 변화가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처음부터 큰 기적을 바라고 훈련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모태신앙답지 않은 - 혹은 너무나 모태신앙다운 - 이 야트막하고 뜻뜨미지근한 믿음을 성장시키고 싶었다. 하나님과 좀 더 친밀해지고 싶었다.

요 며칠 성경을 읽다가 받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걸 해왔다. 내 개인의 필요는 다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만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교외에서 속 편하게 사니까 할 수 있는 기도다.’

‘세상의 풍파를 모르니까 그런 기도에 만족하고 있다.’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이 훈련을 하는 시점에 내가 가진 문제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는 게 의미가 있을 듯하다. 내가 고생한다고 자랑하려는 건 아니다. 나보다 더한 상황에서, 기도조차 나오지 않아 신음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연재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시작점에 이런 문제들이 있었다는 걸 훗날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야 주께서 뭘 해결해 주셨고, 어떤 덤을 얹으셨나를 확실히 알 수 있으니까.


1) 먼저 우리 집에는 억 단위의 빚이 있다. 몇 년 전 수해와 관련이 있다.

2) 막내가 장애 판정을 받아 병원비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는 상황이고, 앞으로 더할 예정이다.

3) 최근 나는 직장을 잃었다. 우리 집은 항상 외벌이였고, 지금은 수입이 온전히 끊겼다.

4) 너무 막내에만 집중했는지 첫째와 둘째에게서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굵직한 것들일 뿐, 그 기저에 뭐가 도사리고 있는지는 주님만 아신다.


아무리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만 한다고 해도, 가장으로서 저런 문제들이 등 뒤에 버티고 있는데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나의 신앙 수준이라는 게 처참하기 짝이 없다. 개인 기도를 스스로 중지시키는 건 지금의 나로서는 이율배반적이고, 그러므로 난이도가 높은 훈련이다.


며칠 전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 ‘온 세상이 주님을 더 잘, 더 널리 알게 하시옵소서’라는 내용의 기도제목을 받아, 그것을 계속해서 올리며 주님과 사역했다고 지난 글에 썼었다. 그리고 그 공동 사역의 대가로 주님께서는 뜻하지도 않은 짬뽕 한 그릇을 선물해 주셨다. 여러 모로 해피엔딩이었지만, 그럼에도 ‘심각한 가정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런 기도만 하는 게 맞는가’하는 의문이 없지 않았다. 다만 그 의문을 ‘그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신뢰로 바꾸고 또 바꿨을 뿐이다.


그걸 주님이 모르셨을 리 없다.


어제도 로마서를 읽다가 ‘율법’이라는 단어에서 내가 기도할 바를 찾아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계속해서 ‘옛 법(율법) 보다 더 온전한 새 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강조하는데, 그게 어제 내가 기도로 감당해야 할 사역이었다. ‘율법에 매이지 않고, 새 법인 예수 그리스도에 매이게 해 주세요’였다. 그런데 주어가 없다? 당연히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하는데, 주님께서 ‘아니’라고 하셨다. ‘오늘 주어는 너희 가족이야.’


그래서 ‘오늘 저희 가정이 온전히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편에 더 가깝게 서게 해 주세요’를 계속해서 기도하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모든 세상을 대상으로 움직이시는 하나님과 발을 맞추려니 가족이 자꾸만 눈에 밟혔는데, 그 마음을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만지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어제까지 바깥에서 사역을 했으니, 오늘은 나와 같이 너희 가정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 기도제목 하나가 짬뽕 한 그릇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응답이었다. 내 마음을 이렇게까지 아시고 살피시는 주님이 든든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난 모른다. 저 기도를 했다고 내가 갑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으로 변한 것도 아니고, 주일 예배를 조금씩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예배를 난데없이 기뻐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티격태격했고, 아쉬웠고, 서운했다. 물론 평소처럼 웃고 장난치고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냥 평소의 우리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 날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라고 생각한 채 잠이 들었고 새 날을 맞이했다. 이제 또 새로운 사역을 주님과 할 시간이다. 오늘은 사무엘상에서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해 하나님과 사무엘을 실망시키는 부분을 읽었고, 새로운 사역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님을 버리지 않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게 해 주세요’였다. 어제처럼 처음에는 이 기도에 주어가 없었다가, ‘우리 가정’이라는 표현이 추가됐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가족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날을 주님께 받은 것이었다. 역시나 기뻤다.


하지만 ‘어제 기도했는데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는 의문이 기쁨 밑에 숨어 있었다. 기도라는 게 늘 곧바로 응답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약간의 실망감 같은 게 생겨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 주님을 왕으로 모시게 해 주세요’라는 새 기도로 그 실망감을 눌렀다. 계속 눌렀다. 그러니까, ‘주님에 대한 실망’이라는 유혹을 말씀으로 대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걸 몇 시간 이어갔다. 골방에 계속 무릎 꿇고 있었던 건 아니다. 평소처럼 아이들과 밥 먹으면서, 밖에 나가 필요한 물건들을 사면서, 막내를 먹이고 씻기면서 계속 오늘의 기도 한 문장을 떠올렸다. 그랬을 때 문득 이런 가르침이 나에게 오는 것을 느꼈다. 강렬했다.

‘기도가 곧 성취다. 기도했으므로 이미 성취됐다.’


아직 기도의 응답이 ‘가시적으로’ 임하지 않았을 뿐, 주님의 차원에서는 이미 이뤄진 것이었다는 의미였다. 우리 가족이 헌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도,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도, 주님의 시간 안에서는 이미 다 성취된 것이었다고 주님이 직접 말씀해 주신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 변화가 없죠?’라는 내 은밀한 질문에 ‘이미 이뤄졌는데?’라고 반문하신 것이었다. 이제 그것이 이 땅 가운데(우리 가족 가운데)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게 내 할 일의 전부였다. 기다림. 아니, 믿고 기다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훈련 1주일 차에 난 ‘약속’을 받았다. ‘네 문제는 다 해결됐다’는 약속이었다. 새 율법에 의거해 주님이 왕으로 집권하시는 가정이 빚에 허덕이거나 질병에 시달리거나 구걸하거나 서로 가시만 내뿜고 살게 될 리가 없었다. 다만 의심이라는 것이 시도 때도 없이 틈탈 텐데, ‘기도가 성취다’라는 그 짧고 강렬한 가르침을 계속해서 입으로 선포함으로써 마음에 새겨 관리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게 곧 ‘믿고 기다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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