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수가성의 기적을 오늘 다시 한번 이뤄달라고, 나도 주님의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기도 했었고, 주님의 자녀들의 주의 영으로 예언하게 해 달라는, 불특정 다수를 위한 중보도 주님의 마음으로 했었다. 주의 백성들이 주께 묻지 않고 다른 것에 먼저 의지하는 죄를 지지 않게 해 달라고도 기도했다. 요한복음과 민수기, 이사야를 읽으며 찾아낸 주님 마음이었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 것이기에 내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난 알고 있다. 내 기도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은 원래 전부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보이는 응답’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주님의 일에 나의 힘과 시간을 조금 투자했더니, 주님께서는 오히려 나의 문제에 반응하기 시작하셨다. 네가 내 일을 하니, 내가 네 일을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돌아보니 그랬다. 주님의 이러한 ‘말 거심(내가 네 일을 대신 이루겠다, 네가 내 일을 먼저 구하니까)’을 이전보다 분명하게 느끼는 게 첫 번째 ‘보이는 응답’이었다.
그럼 주님께서 나의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기도’를 할 때, 어느덧 나와 내 가정의 문제까지도 같이 기도케 하신 게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였다. 예를 들어 수가성의 기적(“온 마을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소서!”)을 놓고 기도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지구상 어딘가 위대한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려나보다’라는 식으로 생각했었다. 미전도 종족 하나가 오늘 전부 구원을 받을 것만 같았다. 그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기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루 동안 그 기도를 이어가니 내 생각은 ‘지구상 어딘가’에서 ‘지구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 지구 전체에는 우리 마을과 우리 가정도 속해 있었다. 요한복음에 나온 수가성 사건이 오늘 지구 여기저기 일어날 텐데(말씀은 이뤄지는 것이므로!), 우리 마을과 우리 가정도 거기에 포함시켜 달라고 나도 모르게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을 이뤄주소서’가 ‘말씀을 나와 우리 가정과 우리 마을에 이뤄주소서’로 커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말씀은 이뤄지는 것이므로, 우리 가정과 마을에 수가성의 기적이 어떤 형태로든 이뤄졌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내 욕심을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주님 말씀을 이루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라 기도가 편했다.
주의 모든 자녀가 영으로 예언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도, 주의 백성이 고집부리지 않게 하소서, 주의 사람들이 주께 먼저 묻게 하소서,라는 기도도, 결국 비슷하게 넓어졌다. 그리고 넓어지니 우리 가족이 포함됐고, 그러니 더 마음을 다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들이 영으로 예언하고, 주 앞에 고집부리지 않고, 주께 먼저 묻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그 기도는 곧 ‘말씀을 우리 가족 안에 이뤄주시옵소서’라는 기도였다. 주님은 내가 주님과 함께 세상을 대상으로 사역을 한답시고 집을 내팽개치게 놔두지 않으셨다. 내가 주님의 일도 하면서, 가족도 충분히 돌볼 수 있게 지혜롭게 나를 품으시고 확장시키셨다.
기도의 주어와 방향만 좀 바뀌었을 뿐이라고?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건 기도해보지 않아서 그렇게 보이는 거다. 말씀을 펼쳐서 주님과 기도해 보면, 내 기도가 저절로 주님의 뜻 안에서 바뀌거나 넓어질 때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그건 내가 내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안타깝다. 당신도 해보시라고 권하는 게 나의 최선이다. ‘기도일 뿐’이더라도 주님의 일을 우선시할 때 주님은 나와 나의 가정을 놓치지 않으신다.
그런데 저 기도들을 막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나에게 스치듯 마음 하나를 주셨다.
‘너희 가정에 기쁨이 없다면, 그건 온전히 너의 책임이다.’
우리 가족은 그늘지거나 어둡지 않다. 매일 웃고 떠든다. 하지만 그 시끌벅적함 속에 찜찜함이 있다. 불안함이 있다. 우리의 성깔들이 있고, 불순종이 섞여 든다. 어느 날부턴가 그게 가장인 나의 고민거리였다. 왜 우리는 기쁜데 기쁘지 않을까. 어디서부터 뭘 고쳐야 할까. 그런데 그 고민을 주님이 알고 계셨고, 그게 내 책임이라는 답을 주신 것이다.
내 첫 반응은 물음표였다.
‘주님? 저희 집 분위기를 주도하는 게 제가 아니란 걸 아시지 않나요? 저는 기도만 할 뿐 아무런 힘이 없어요. 아... 더 기도하라는 말씀이신가 보죠? 알겠습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방목형’ 사랑을 하고 요구하는 편이라 어디서든 ‘분위기 조성’이나 ‘주도’와는 한참 거리가 먼 삶을 40년 넘게 살아왔다. 기쁨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라는 주의 음성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며칠이 흘렀다. 주님의 일을 도모하기 위한 기도를 여느 때처럼 하는데, 내 마음에 기쁨이나 설렘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성경에서 주님의 말씀을 찾아 그날의 기도문을 얻어내고 실행하는 게 형식적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어디선가 이뤄진다’는 게 이론에 입각한 믿음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눈으로 보고 싶었다. 내가 하는 기도가 구체적으로 이뤄지는 걸 봐야 믿음이 강해질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억누르자니 기도가, 주님과 함께한다는 그 포부가, 시들시들해지고 있었다. 기도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느낌.
그러나 주님은 동아줄을 하늘에서부터 내려주셨다.
‘왜 그러느냐?’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게 아직 저한테는 과분한 거 같아요.’
‘그 기도들을 했을 때 기쁨을 주지 않았느냐?’
‘그건 맞는데, 그 기쁨을 제가 오래 붙들지 못해요.’
‘왜 그런 줄 아느냐? 애통한 마음이 부족해서다.’
‘애통한 마음이요?’
‘나는 나의 일을 이룰 때 간절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시작한다. 사람의 마음에 다가갈 때 절실하고 애절하다. 절박하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라도 나에게 돌아왔을 때 내가 큰 잔치를 베풀고 기뻐 뛸 수 있다. 네가 나와 애통함을 나눌 때가 된 것이다.’
‘단지 기대감으로 기뻐하는 건 1단계. 애통함까지 갖추는 게 2단계인 건가요?’
‘너의 경우는 그렇다. 이제 좀 더 애통한 마음을 나와 공유하자.’
그러면 애통한 마음은 어떻게 갖는 것일까? 주를 모르는 그 미지의 사람들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면 될까? 어쨌든 해보자, 답을 주시겠지. 그 궁금함으로 성경을 펼쳤을 때 주님께서는 민수기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묻고 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이집트를 의지한 걸 슬퍼하셨다는 구절을 주셨다. 이게 오늘의 사역이었다. 주님 외 다른 걸 의지하고 섬기는 걸 없이해주세요. 세상 사람들은 물론 나와 우리 가정에서도 모든 우상을 제해주세요. 그 기도를 평소처럼 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정말로 애통함으로 이어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회개’가 시작됐다. 나와 내 가정이 간직했던 모든 은밀한 우상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서 가지고 있던 우상들이 아니었다. 우리도 제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게 너무 답답하고 싫었다. 회개를 하며 주님께 매달렸다. 우리 안의 우상들을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말끔히 청소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는 아직 주님보다 돈을 더 의지합니다. 우리는 아직 주님보다 내 경험을 더 의지합니다. 우리는 아직 주님보다 나의 정의를 더 의지합니다...
나와 가정의 회개는 세상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세상의 대변인이 된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주님의 아픈 마음을 나도 어느 정도 나눠가진 것이다. 주님이 얼마나 답답하실까. 얼마나 슬프실까. 얼마나 건져내고 싶으실까. 얼마나 알려주고 깨닫게 해주고 싶으실까. 얼마나 그 마음 문들을 열고 싶으실까... 주님, 정말로 오늘 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더 의지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게 주님의 소원이고, 그게 주님이 이루실 바임을 믿습니다. 나의 기도는 그렇게 이어졌다. 주님과 하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역이 조금 업그레이드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날 기적이 일어났다. 막내가 병원에서 재활 훈련을 받을 때, 요 몇 주 ‘아이가 너무 하기 싫어한다’는 피드백을 모든 선생님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선생님들과 치료실 환경에 너무 익숙해졌나,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하나,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들이 내 안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주님의 애통을 나눠 갖고, 주님 앞에 회개로 나아간 그날, 아이의 수업 참여 태도가 달라졌다. 그날 거의 모든 선생님이 막내가 오늘은 집중을 오래 잘했다고 칭찬했다. 언어 수업 때는 자기가 먼저 책상 앞에 앉아 20분 동안 움직이지 않고 훈련에 임했다고 놀라워했다. 선생님들은 ‘아이가 오늘 푹 잘 잤나 봐요’라고 짐작했지만, 난 비결을 알고 있었다. 내가 회개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수업 태도는 내 책임이었던 것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정말로 내 일을 대신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기도를 올리는데 문득 지난날 물음표로 남겼던 말씀이 생각났다.
‘네 가족에 기쁨이 없다면, 그건 네 책임이다.’
이번에는 물음표 대신 ‘그렇습니다’라고 반응했다. 내가 뭘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 가족 내 기쁨이라는 게 형식적이거나 일시적이거나 사라지고 있는 중이라면 그건 내 책임이 분명했다. 내가 뭘 해야 할지는 주님이 알려주실 것이다. 오늘 나를 애통의 회개로 이끄신 것처럼 말이다. 거기에 순종할 때 우리 가족의 기쁨은 순도 높은 것이 되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