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필요를 뒤로 하고 먼저 그의 나라를 구했을 때 주님의 입장은 어떠실까.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런 숭고한 결단을 한 사람이 누구든 크게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세상 최고의 지성과 재력을 갖춘 사람이더라도, 대세에는 영향이 없다. 현 지상 1위 파워 소유자인 미국 대통령이 하나님만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선다 해도, 하나님께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나 같은 방구석 백수라면 어떨까. 오히려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인데, 사실 짐이 되는 게 맞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나 같은 자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한다고 달려들면 일단 팔 벌려 안아주신다. 그리고 내가 주님의 일에 잘 참여할 수 있게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 그러니 내가 주님의 일을 한답시고 주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주님께는 일거리만 늘어나는 거다. 하하. 주님, 죄송해요. 그래도 어떡해요, 나는 주님 말씀을 그대로 지키고 싶을 뿐인데.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주님께서 바삐 채워주시는 나의 필요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것과 대부분의 경우 다르다는 것이다.
나 같이 야트막한 믿음을 겨우 부여잡고 살아가는 사람의 경우, 먼저 그 나라와 의라는 번지르르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무릎을 꿇더라도, 그 음흉한 속내를 미처 다 제거하지 못하고 주님 앞으로 다가간다. 주님의 일을 먼저 할게요,라고 하지만 사실 그 뒤에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개인적 간구가 숨어 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주님이 해결해 주시길 기대하는 거다. 물론 주님도 이걸 모르지 않으신다. 모른 척 주의 일에 하찮은 자들까지도 참여시키시는 것일 뿐.
그 필요란, 나의 경우 아이의 건강과 직장 문제였다. 특히 직장은 가족의 생활비는 물론 아이 병원비와 직결된 문제라 시급했다. 그나마 퇴직금을 얼마간 받아두었기 때문에 조금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럴 작정이었다. 그러면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고 있으면 퇴직금이 바닥나기 전에 주님으로부터의 건지심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은근히 하고 있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나의 기도는 사실 인간적 계산으로 점철돼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주님이 보시는 필요는 그게 아니었다. 아직도 주님이 지금의 기간 동안 하시고자 하는 일이 뭔지 다 알지 못하지만, 그중 하나를 최근 알게 됐다. 그건 내 안에 있는 우상을 지우는 거였다.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주님은 그 무엇보다 우상 금지를 강조하셨었다. 광야에 있을 때도, 가나안에 들어가 새 출발을 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에 대해 가장 강력히 경고하셨다. 나에게도 주님은 비슷한 마음을 주셨다.
가장이다 보니 퇴직한 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매 순간 고민하게 된다. 시키지 않아도 머릿속에 계산이 자동으로 이어진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건 퇴직금이었다. 퇴직금이 얼마고, 우리가 써야 할 돈이 얼마인지 계산해, 앞으로 몇 달 정도 살 수 있을지를 어림잡는 게 습관으로 자리를 잡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님께서 그 돈 전부를 원하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정확히는, 내가 그 재정을 흘려보낼 곳을 자꾸만 생각나게 하신 것이다. 일부도 아니고 전부를.
다행히 나는 대단히 나일론에 가까운 신자이긴 해도, 딱 하나, 주님께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꽤나 엄격한 교육을 받아왔다. 우리 가족의 마지막 생명줄 같은 그 돈을 전부 다른 곳에 보낸다는 것 자체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다만 그것을 식구들에게 납득시키는 게 두려웠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더 이상 생활비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은 돈을 전부 다른 곳에 건네자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퇴직금 계산기가 탁탁 돌아갈 때마다 가족의 마음을 주님께서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나의 이 필요 하나는 꼭 끼워 넣었다.
그런 식으로 한 3~4주가 지났다. 어느 날 저녁 아내가 사뭇 심각한 얼굴로 얘기 좀 하자 했다. 컴퓨터 화면에 자기가 기도하면서 쓴 글을 띄웠다. 읽어보니 그 퇴직금에 관한 내용이었다. 심지어 그걸 다 흘려보내자는 내용이었다. 물론 헌금할 곳도 내가 생각했던 곳과 동일했다. 아무리 기도해도 그게 지금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이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기도하면 할수록 그 두려움을 기쁨이 대체했다고 한다. 지금 이 기쁨이 남아 있을 때, 사단이 두려움으로 이 기쁨을 갈아치우려 하기 전에 얼른 송금하자고 했다.
이럴 수가. 이토록 분명한 기도 응답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을 잃고, 연신 감탄사만 내뱉었다. 각본 짠 듯이 응답이 이뤄지는 이 상황이 기쁘고 감사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부부는 모든 걸 주님이 보내라는 곳에 우리 마지막 재산을 보내 제로베이스가 됐다. 이제부터 만나를 먹는 생활이 시작된다고, 아이들에게도 선포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했다. 아마 생활비 없는 삶이란 게 무엇인지 가늠하지 못했으리라. 실감이 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가족 전체가 제로베이스가 되자(우리가 모든 재정을 흘려보낸 곳에 이미 둘째도 모든 용돈을 보낸 바 있었다) 주님께서는 첫 번째 가르침을 주셨다. ‘우상 숭배’의 다른 이름은 ‘믿는 구석’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주님 외 다른 믿는 구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주님은 도무지 지켜보실 수 없으셨다. 몇 달 정도 퇴직금으로 버틸 수 있다는 내 마음속 은밀한 생각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셨고, 멋지게 없애버리셨다. 난 감사했다. ‘믿는 구석’이 우상 숭배였다니, 나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주님의 새 표현과 새 가르침은 늘 설명하기 힘든 기쁨을 준다.
두 번째 가르침도 있었다. 둘째와 단둘이서 식사를 하게 된 자리였다. 아들이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해 떠봤다.
“광야로 들어가는 기분이 어때? 만나가 곧 내려올 거 같아?”
“... 아직 실감이 안 나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도 되지 않아요.”
“하긴, 아빠도 그래. 너는 더 그렇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 둘만의 어색한 침묵. 내가 대화를 지속시켰다.
“근데 아빠는 예전부터 늘 의문이던 게 하나 있었어.”
아들이 그게 뭐냐는 듯이 쳐다봤다.
“내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아빠는 이게 늘 궁금해. 우리가 지금 한국이라는 좋은 나라에서 그리 어렵지 않은 형편으로 잘 살고 있잖아? 혹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만약 우리가 북한이나 중동처럼 목숨 걸고 신앙 생활 해야 하는 곳에 있다면,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계속 사랑할까? 배교하지는 않을까? 그게 늘 궁금했어. 그렇다고 실험해 볼 수도 없고.”
그러자 아들은 그 고민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동의했다.
“나도 딱 그게 궁금했어요.”
놀랐다. 아들만 할 때부터 가졌던 나의 궁금증이 어느새 대물림된 걸까. 난 한 번도 이런 나의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는데. 그리고,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극한 상황에서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까가 궁금하다는 건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놓지 않고 싶어 하는 소원이 있다는 뜻이니까. 이 녀석, 나만큼 간절하구나 싶었다.
그 순간 스치는 말씀이 있었다. 항상 기뻐하라는, 신앙인이라면 100만 번도 넘게 들었을 말씀이었다. 그동안 삶의 굴곡이 있을 때마다 엎어지고 넘어져 울부짖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든 순간들이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든 순간이 예수님을 생생히 배반하는 광경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기뻐하지 않는 것이 주님을 배신하는 거였던 것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이스라엘 백성은 왜 하나님의 진노를 샀는가? 매 순간 불평해서였다. 기적을 경험하고도 망각해서였다. 즉, 기뻐하지 않아서였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 앞에서 기쁘지 않는다는 건 배교였다.
“우리가 이번 기회에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볼 수 있을 거 같아. 그게 정말 기대돼.”
아들은 씩 웃었다.
“그런데 너랑 내가 이렇게까지 고백을 했다는 건 말이야, 이제부터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야. 지금부터 벌어질 모든 상황에서 기뻐하지 않는 게, 하나님을 배신하는 거야. 그러니까 계속 기뻐하자. 이스라엘처럼 불평하지 말고.”
아들은 알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정도 신앙의 대화는 나눌 정도로 아이가 자란 것에 새삼 감사했다.
그렇게 나는 믿는 구석을 전부 버리고(앞으로 더 버려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기쁨으로서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자로 남아있기로 결단하게 됐다. 거기에 우리 가족들까지 동행해 준다니, 나는 든든하다. 결코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는 하나님이 아니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옆에 이런저런 모양의 지원군을 같이 허락하심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그분을 알아감이 참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