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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 없는 기도를 용납하지 말라

by Moon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를 실천하기 위한 훈련에 돌입하고서 얼마 간 시간이 지났다. 당연하지만, 나 같은 나일론 신자가 갑자기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거룩한 자가 되지는 않는다. 내 개인적 소원을 실은 기도가 아니니 마음이 담기지 않을 때도 있고, 그러니 하루를 살면서 잊어버릴 때도 부지기수다. 심지어 그 기도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결과도 알 수 없어 허공에 혼잣말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기도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오늘은 특별한 계기(아들과의 예배)로 두 가지 말씀을 붙들게 됐다. 시편과 사무엘상의 말씀들이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시 23:1)

요건 아들이 기도한 후에 선택했다.

- 오직 여호와만을 두려워하시오. 여러분은 온 마음을 다하여 언제나 여호와를 섬겨야 하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위해 하신 놀라운 일들을 잊지 마시오.(삼상 12:24)

이건 내가 뽑았다.


평소의 나였으면, 아마 이 두 구절을 가지고 기도한답시고 이렇게 했을 것이다. “주의 자녀들이 여호와를 목자로 삼아 부족함 없이 살게 하소서. 그리고 그 자녀들이 여호와를 온 마음으로 섬기게 하소서.” 문구는 뭐 대강 그럴듯하다. 그럴듯해서 그냥 이런 구절을 몇 번 마음으로 읊고, 기도 제목을 기록한 메모장에 남기고, 또 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틈틈이 메모장 넘겨보며 ‘아, 맞다, 오늘 이런 기도 했었지’하고 되새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나보다 주님이 더 그런 기도에 지치셨다는 느낌이 왔다. 사실 그게 말이 좋아 기도지, 주문에 가깝지 않았을까. 아무런 마음이나 진심도 담기지 않은, 그럴듯한 문장. 생명력도 없고, 따라서 기도자인 나 자신에게조차 아무런 감동이 되지 않는 문구. 그게 어떻게 하늘에 올라갈 수 있을까. 없다. 하나님께서도 이제 슬슬 ‘좀 바뀔 때도 됐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뭐가 바뀌어야 할까? 결과 없는 기도를 용납하지 말라, 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기도에는 응답이 있기 마련이니, 그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도해야 기도다’라는, 어디선가 들어본 가르침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만 여기서 ‘응답’이란 여러 가지다. 내가 기도로 구한 것이 정확히 이뤄지는 것일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나는 알고 있다. 전자와 후자가 겹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는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기도를 해보려는 내가, 아무런 응답 없이, 빈 손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불완전할지라도 말씀을 실천하고, 말씀대로 살아보려 한 사람에게 ‘무플’을 주시는 하나님일리 없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달리 하나님은 가르치고 알려주시고 경고하시고 안내하시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응답을 강력히 구했다. 시편과 사무엘상의 문구를 가지고 기도하라고 하신 건 응답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겠냐고, 그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하겠다는 으름장(?)을 올려드렸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두려웠다. 기도의 제목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나는 기도로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하면 그 답이 꽤 긴 시간을 지나야 오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재보기도 했는데, 두 시간짜리 기도회 시작 시간에 했던 기도에 대한 답이 기도회 마무리 중에 오면 빠른 거였다. 보통은 아침에 묵상하고 기도로 질문을 올리면, 오후 늦게 서서히 깨달음이 오곤 했다. 다음 날이나 다음 주로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과연, 이번에도 기도를 시작했을 때 별 다른 깨달음이나 느낌이 팍 오지는 않았다. 아, 이거 내가 말 실수 했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 하루의 스케줄이 나름 꽉 차서인지, 하나님께서 사정을 봐주셨다. 생각보다 빠르게 주님의 가르침이 온 것이다.


먼저 누구나 잘 아는 시편 구절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에 대해서 이 날 내가 새롭게 받은 표현은 “인과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회 좀 다녀본 사람이라면 줄줄 외우는 이 구절이, 실제 살아갈 때 얼마나 힘이 되는가? 난 나를 포함해 돈 달라고, 합격시켜 달라고, 승진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수두룩하게 많이 봤지만, 여호와만 있으면 부족하지 않으니 여호와를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나 포함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부족함이 없다’를 체험해보지 못했고, 그래서 이 구절은 일종의 격언 정도로만 남이 있다. 말씀이 주는 힘은 온데간데없다. 슬픈 현실이다.


나 포함 많은 사람들이 문장의 앞부분을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여호와가 목자여야 부족함이 없는 건데,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지는 않으면서 부족함만 해결해 달라고 떼를 쓰고 있던 나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나 포함 많은 신자들의 성경 구절은 “여호와는 나의 수많은 옵션 중 하나이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이다. 자매품으로는 “여호와는 나의 지갑이니, 내 잔고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뇌이니, 내 학업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등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안 되니 부족함이 넘칠 수밖에.


그렇다면 어떻게 ‘여호와 = 목자’라는 공식을 정착시킬 수 있을까? 그 답이 사무엘상 12:24에 나와 있다. “오직 여호와만을 두려워하시오. 여러분은 온 마음을 다하여 언제나 여호와를 섬겨야 하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위해 하신 놀라운 일들을 잊지 마시오.” 여호와’만’ 두려워하고, ‘온’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난 특히 이 마지막 ‘잊지 말아야 한다’가 중요하다는 마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신 많은 일들 중 ‘돈’이나 ‘승진’, 취업’ 등 우리 현실에서 우리가 조급히 원하는 것들이 아니면 우리는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아신다. 기도 없이도 충분히 이해하신다. 그 필요들이 언제 채워져야 하는지도 꿰뚫고 계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필요를 채우시기 전에 다른 ‘영적인’ 필요들부터 다루신다. 예를 들어 몇 월 며칠까지 치러야 하는 대금이 있어서 기도를 한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때는 그 몇 월 며칠이 아닌 경우가 많다. 당사자는 돈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겠지만, 하나님은 마감일을 미뤄주시는 식으로 응답하실 때도 있다. 그리고 그 열렬한 기도를 통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신다거나, 그에게 필요한 믿음 훈련을 시키시기도 하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도해도 소용없다’로 이 사건을 기억하지(혹은 기억하지 못하지), 영적 성장을 이뤄냈다고 감사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 기억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크기를 내 기준으로 재단해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심지어 망각까지 한다는 건, 사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 나는 ‘부족함이 없다’는 문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됐다. 오늘날 한국 교회도 같이 볼 수 있었다. 성경에 분명히 박혀 있는 그 말씀이 이뤄지지 않는 건, 내가(그리고 많은 한국 교회가) 여호와를 여호와로 모시지 않아서다. 인과관계가 심각하게 틀어져 있다. 부족함을 없애달라고, 주님의 풍성함을 누리게 해달라고, 말씀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이뤄달라고 목소리 높이기 전에, 여호와가 정말로 나의 목자이신지 살펴야 한다. 성경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전제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성령님의 가르침은 끝나지 않았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이미 모든 자녀들에게 이뤄진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과관계 때문에라도 주님께서는 기도자들이 자신을 목자로 섬기는지 안 섬기는지 면밀히 살펴보시다가 부족함이 없게 채워주시거나 부족함을 주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셔서, 대부분의 경우 이미 부족함 없이 다 채워놓으신 채로 기도자들이 자신을 목자로 받아들이기를 기다리신다. 다만 우리가 그 ‘부족함 없는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한다 하면서도, 주님과 도무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내 모든 상황들은 부족함 없이 채워진 것일까? 솔직히 나는 자신 있게 ‘예쓰’라고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래서 다행이다. 내가 내 짧고 부족한 눈을 가지고 판단했을 때 ‘부족함 없다’고 말할 정도라면, 그건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황일 테다. 하지만 무거운 빚에, 실직에, 아픈 자녀까지 겹친 이 상황이라면 누가 봐도 부족함이 많은 상태일 것이다. 그럴 때 내가 주님 앞에 ‘내게 부족함이 정말로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고 또 고백한다면, 그건 믿음의 선포가 될 수 있다. 내가 당장 내일부터 온갖 복을 받아 ‘객관적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면 드릴 수 없는 유형의 믿음이다. 가난할 때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이거라면, 난 지금의 시기에 더 풍성히 드리고 싶다.


이렇게까지 기도와 묵상을 하고 나니, 내 기도는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원래는 이거였다.

“주의 자녀들이 여호와를 목자로 삼아 부족함 없이 살게 하소서. 그리고 그 자녀들이 여호와를 온 마음으로 섬기게 하소서.”

하지만 응답(가르침)이 있기까지 기도했을 때 나의 기도는 이렇게 변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의 자녀들이 이미 부족함이 없다는 걸 깨닫고 믿고 선포하게 하소서. 그래서 주의 마음이 기쁘게 하소서.”


기도가 바뀐 게 나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큰 응답이다. 이 주님의 크신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오늘 일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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