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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늘부터 도제식을 선택합니다

by Moon

“그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8절)


이 본문은 6개의 문장으로 이뤄졌는데, 그중 4개의 문장에 ‘안다’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아무 쓸모없는 것임을 ‘알고’,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되지 않고,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알며’, 그리스도를 ‘안다’고 쓰여있다.


‘안다’는 건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갖추고 깨닫는 걸 의미한다. 뭔가를 알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는 기존의 지식을 보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지식을 타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곱셈을 배운다고 했을 때, 우리는 덧셈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삼지 기존 지식인 덧셈을 부정한 채로 곱셈을 새로 배우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창법을 익힌다고 했을 때, 기존 창법을 고수하지는 않는다. 여태까지 했던 것을 ‘잘못된 버릇’ 혹은 ‘쪼’로 여기고 버린 채 새롭게 익힌다.


기존의 것들을 발판으로 삼아 더 새로운 것들을 쌓아가고 지식을 확장하는 방식은 우리가 잘 아는 학교 시스템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다. 1학년 때 배운 것을 더 잘 기억하면 할수록 2학년 공부가 쉬워지는 건 이 때문이다. 기존의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들을 쌓아감으로써 지식을 확장하는 방식은 아직 여기저기 남아 있는 도제식 교육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다. 가수, 작가, 예술가, 사진가, 기자, 디자이너, 심지어 예전 바둑 기사들이 이런 식으로 경력을 쌓아 일가를 이룰 때가 많았다.


도제식 교육의 첫 번째 핵심은 ‘좋은 스승’이다. 학생들의 스승에 대한 선망과 존경심에서 관계가 시작하며, 그래서 학생들은 의심 없이 배움을 진행하고, 그러므로 스펀지가 물을 빨듯이 스승의 모든 것을 쭉쭉 빨아들인다. 그런데 한참 배우고 나니 스승이 소문과 달리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너무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낭비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이미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게 된다. 그 스승이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학생은 자기가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저절로 익히는 특혜를 누린다.


반면 학교의 핵심은 ‘체제’다. 선생님들은 체제가 정해준 것을 정해준 분량대로 가르치면 되니까 인간적 약점이나 결함을 덜 드러낼 수 있다. 학생들이 선생의 인간적 약점에 아예 노출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도제식보다는 보호된다. 대신 선생의 좋은 점 역시 깊이 있게 볼 수 없고, 따라서 분야 내 지식 외의 장점을 습득할 기회가 줄어든다. 그야말로 지식 전수라는 도구로서만 스승과 학생은 존재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도제식 교육을 진행하셨다. 하루라도 빨리 지구촌 선교를 해야 한다며 신학교를 설립하시는 것으로 공생애를 이루시지 않으셨다. 심지어 구름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핵심 제자는 단 12명으로 유지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하려면 교리를 얕고 넓게 전파하는 것보다, 소수에게 깊이 있는 진리를 전수하는 게 더 낫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그 ‘깊이 있는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 자체셨고, 그러므로 스승의 모든 것을 전 인격적으로 보고 배울 수 있는 도제식 교육이 학교식 교육보다 확실히 더 알맞았을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시간을 보낸 뒤 ‘교리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잘 외운 사람’으로서 기록돼 있는 게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과 같은 기적을 담대히 행하는 능력의 사람이 됐다. 그런 제자들을 통해 이후 신도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도 한다. 스승이 얼마나 훌륭하면 도제식 교육을 했는데도 마치 학교식 교육을 한 것처럼 학생들이 증가한 것인데, 이 정도의 성공 사례로 남아 있는 도제식 교육의 기록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훌륭한 스승이었는지 알 수 있다.


도제식 교육의 두 번째 핵심은 ‘버리기’이다. 본인도 출판사 편집자와 기자 생활을 하면서 도제식 교육의 현장들을 수없이 많이 접했다. 어마어마한 명성을 가진 디자이너 한 분이 운영하시는 작은 스튜디오에는 적은 급여도 마다하지 않고 그 분과 같은 공간에서 일만 시켜달라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분과 협업하는 한 사진가 분 역시 제자와 같은 조수를 두세 명씩 동원해 무거운 촬영 장비들을 들고 다니게 했다. 기자 선배들은 후배 기자들의 글에 늘 빨간색 밑줄을 그어주며 야단을 쳤다.


적은 급여, 무거운 장비, 야단... 이 모든 것을 통해 제자를 자처한 사람들이 배우는 건 무엇일까? 자기의 잘못된 습관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적은 급여를 받고서라도 저 훌륭한 디자이너의 실력을 갖겠다는 사람이 자신의 어설픈 디자인 감각을 고집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 무거운 촬영 장비들을 이고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사부 욕하며 이를 가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다 배우는 과정이라고 말하며 오히려 자기들을 버렸다. 후배 기자들 역시 오래 살아남는 사람들은 자기 글에 대한 자부심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과거 쌓아왔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게 됐다고 오늘 본문을 통해 고백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어부 일을 그대로 하면서 가끔 시간 날 때 내 가르침 받으러 오라고 하지 않으셨다. “네 그물을 그대로 가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가족의 장례도 죽은 사람들에게 맡기라고 하셨을 정도로 기존의 것을 버리라고 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전통에 호통을 치기도 하셨고, 당대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과 친구 하셨다. 전통, 관습, 선입견, 내가 아는 율법, 기존 삶... 이 모든 걸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다. 2천 년 전에도, 지금도.


나의 모든 것을 버리니 예수님을 알게 됐다(“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게 지금까지도 도제식 교육으로만 가능하다는 걸 뜻한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들, 그리고 성도들이 행하고 있는 신앙생활과는 사뭇 다른 결론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나부터도 예수님을 도제식으로 배우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학교식 시스템 안에서만 교육을 받고 학습을 해왔기 때문에, 누군가를 1:1 관계 안에서 스승으로 모신다는 개념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 과제를 할 때조차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늘 어려웠고,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누군가를 따른다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도제식 교육이 만연한 펀집자와 기자로 살았지만 도제식 관계를 쌓지 못해 늘 비주류로 바깥에 맴돌았고, 교회 안에서조차 교회에 녹아들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둔 채 반쯤 외부인으로 있었다.


교회에 등록해 각종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고 해서 도제식으로 예수님을 배우고 있는 게 아니다. 설교 말씀을 듣고, 메모를 하고, 심지어 주중에 다시 듣거나 메모한 걸 복기해 가며 마음에 새긴다 하더라도, 결국 학교 수업받는 식으로 예수님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배움이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수업’만 있고 스승이 없다면, 도제식 교육도 없는 것이다. 즉 스승과 삶을 같이 살지 않으면 그냥 학교에 다니는 거나 다름이 없다는 의미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주 5일 근무하다가 예수님이 회당에 모습을 드러내실 때나 주말에만 강의 노트 들고 등장한 게 아니란 걸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님 질문에 숱한 오답을 낼지언정 예수님 옆을 늘 지키고 있었다.


예수님을 알아간다고 했을 때의 스승은 ‘말씀’과 ‘성령님’이다. 도제식으로 예수님을 배우려고 스승의 문하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그건 말씀과 성령님을 항상 곁에 모시고 있겠다는 의미가 된다. 오답을 내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중요한 순간에 배신하는 실수를 하더라도, 말씀과 성령님이 나의 스승임을 선포하고 24시간 받들어 모셔야 한다. 모든 걸 빨아들여 흡수해야 한다. 가끔 생겨나는 내 궁금증에 대한 답만 간편하게 쏙쏙 빼먹는 건 도제식이 아니다. 그건 요즘 챗지피티도 잘하는 거다. 말씀과 성령님은 문제집이나 전과가 아니다. 스승이다.


그다음 문제는 ‘버리기’에 있다. 도제식 교육의 핵심은 여태까지 내가 형성해 왔던 버릇들을 버리고 깨끗한 백지가 돼 배움을 새로 시작하는 것에 있다고 했다. 사실 내 개인적 경험상 도제식 교육의 절반은 ‘쪼를 버려!’라는 호통을 쉬지 않고 듣는 것이 거의 전부다. 죄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예수님을 따른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물론 죄를 버리려는 진실된 노력의 과정 중에 있어도 예수님을 따를 수는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 모두는 과거의 쪼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버리는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더 알고자 하는 건 크리스천들의 고정 기도 제목 중 하나다. 하지만 기도한 만큼 우리가 올바른 방법론을 택하고 있는지 한 번 자문할 필요는 있다. 혹시 나는 학교에서 공부한 것처럼 예수님을 배우려 하는 건 아닌지, 진정 말씀과 성령님을 24시간 스승으로서 모시고 같이 살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또한 스승이 쪼를 버리라고 했을 때, 그 쪼를 잘 버리고 있는지, 쪼 버리는 방법을 스승에게 구했는지도 살펴야 한다. 올바른 기도와 그 기도에 걸맞는 실천이 맞물린다면, 폭풍 같은 시너지가 나 우리는 드디어 그리스도를 더 알게 되는 기도 응답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거만 한 응답은 어디에도 없다.


3줄 요약 :

1. 예수님을 배우는 건 도제식으로 해야 한다.

2. 도제식의 첫 번째 핵심은 스승과 같이 동고동락하는 거다.

3. 도제식의 두 번째 핵심은 내 안에서 쪼를 찾아 버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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