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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이야기, 뭔가 이상하다?

by Moon

이스라엘의 거대한 역사를 서술하는 ‘사무엘서’의 첫 장면은 한 가녀린 여성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이 여성의 이름은 ‘한나’이며,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로 고통을 받는다. 그 문제를 주님 앞으로 가져가 해결을 보고, 적잖은 자녀의 어머니가 된다는 게 한나의 라이프스토리다.


이 이야기를 세밀히 읽다 보면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 아이를 못 낳는 게 그렇게까지 괴로울 일인가, 가 첫 번째다. 그냥 그 시대에는 아이를 낳았느냐, 낳았다면 몇 명이나 낳았느냐가 여성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나 보다, 하면서 읽을 수는 있다. 아니면 한나 개인적으로 아이를 꼭 낳고 싶은 소원이 있었을 수도 있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을 찾는 게 막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낳고 싶은 부류 중 하나니까. 그래서 명확하고 속이 시원하게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넘어갈 수 있다.


아이 낳는 게 너무나 큰 소원이라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는 것은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지금도 우리는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잔뜩 가지고 교회로, 혹은 기도 처소로 간다. 눈물로 울부짖을 때도 있지만, 한나처럼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기도할 때도 있다. 한나의 그 입술만 움직이는 기도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그 기도의 행위를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아이 한 번 낳아보는 게 소원인 한나의 서원이 영 이상하다. 아이만 낳게 해 주시면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니, 물음표가 여러 개 뜬다. 보통 아이를 가져보고 싶다는 건, 그 아이를 ‘키워보고 싶다’는 거 아닌가? 그 작은 아이가 점점 자라 걸음마도 하고, 말도 배우고, 재롱떠는 것도 다 보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아이를 바치겠다면, 한나에겐 ‘잉태하여 출산했다’는 그 물리적 과정과 경험만이 중요한 것이었을까? 나로서는 한나의 그런 마음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만큼 아이 출산만 절박했던 걸까?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하나님이다. 극히 개인적으로 보이는 기도로 탄생한 아이를 이스라엘의 마지막이자 위대한 사사로 키우신다. 한나가 자기 아들을 위대한 지도자로 키워달라고 기도한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를 놓고 애통하는 심정으로 구국 기도회를 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첩에 비해 자녀 실적이 떨어지니 채워달라는 개인의 기도에 너무 후하게 응답하신 거 아닌가? 구한 것에 비해 돌아온 응답이 지나치게 큰 느낌이다. 그러면 내 성적이나 연봉이 너무 낮다고 울부짖으면, 그 기도는 왜 안 들어주시는 걸까?


이 질문들 때문에 성경 통독의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고 있었다. 기도했더니, 불현듯 당시 이스라엘 전체의 상황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이스라엘을 치려는 강대국들이 주변에 즐비한 상황인데, 이스라엘에는 마땅한 지도자가 없었다. 엘리가 그 지도자 역할을 했어야 했는데, 그는 자식을 입으로만 교육하고 자식들의 부정한 수익을 같이 즐기던 비윤리적인 인물이었다. 지도자로서 실격이었다. 게다가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왕 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했다고 서술한다. 지도자가 없으니 백성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스라엘 상황과 한나의 상황에 희미한 등호(=)가 생겨났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고통스러웠고, 이스라엘은 제대로 된 지도자를 낳지 못해 고통스러웠다. 물론 이스라엘은 ‘우리가 마땅한 지도자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걸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고통 중에 있다고 하기 어렵다. 그런 이스라엘을 지켜보는 하나님께서 참 많이 아프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고통스러웠고, 하나님은 제대로 된 지도자를 이스라엘 중에 낳지 못해 고통스러웠다, 고 말할 수 있다. 한나의 고통은, 사실 하나님의 고통이었다고 봐도 된다! 한나는 하나님의 애통을 짊어진 것이었다. 한나가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약간의 질문들, 혹은 어색함들이 해결된다.

1) 아이 못 낳는 게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운 일이었나? - 한나가 하나님의 고통을 공유하고 있었다면 그럴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고통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하셨는데, 그걸 한나로 택하셨다면 이해가 간다. 한나로서는 ‘아니, 겨우 아이 못 낳는 거 가지고 내가 이렇게 슬플 일이야?’라고 묻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한나를 택하셨을까? 이건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은 자신의 아픔과 같은 결의 아픔을 누군가 같이 느끼고 표현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보통 ‘하나님의 애통함을 이해하는 자’라고 한다면, 하나님 관점에서 거대 인류사를 꿰뚫고 있을 정도의 학식이나 혜안이 있는 자들일 것 같다. 하나님과 비슷한 높이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현재 지구의 모습과 인간 삶을 통찰해야 겨우 하나님의 마음 끄트머리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저 한 마을에 살고 있는 평범함 불임 여성 한 명을 택하셨다. 그녀에게 거대한 역사를 가르쳐주시지도 않았고, 시사 정보를 머리에 채워주시지도 않으셨다. 그냥 하나님과 비슷한 처지에 놓으시고 울게 하셨다. 한나는 ‘낳지 못한다’는, 하나님과 똑같은 고통을, 그것이 똑같은 고통인지도 모른 채 아파했다. 그게 다였다.


창조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인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이 찢기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걸 이미 다 보고 계시는 분이시니 아프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삼위일체의 하나님,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일 정도로 누군가와 같이 하는 걸 소중히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아픔마저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으시다. 그 역할을 한나가 했다. 하나님의 아픔을 나눠 받는 인생이라니, 얼마나 복된가. 아이 못 낳는 게 그토록 아플 만하다. 하나님의 아픔이었으니 말이다.


2) 개인적인 기도였을 뿐인데, 나라 전체를 살리시는 응답이라니? - 이 문제도 자동으로 해결된다. 한나가 자각하고 있었던 아니든 그녀는 하나님의 아픔을 짊어진 사람이었으니, 애초에 그녀가 했던 기도가 개인적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그저 내 지갑 채워주세요, 라든가 내게 명예를 좀 주세요,라고 하는 ‘복 비는 기도’와는 결이 다르다. 내 태를 채워주세요,라고 한나 스스로는 기도했을지 모르지만, 그 기도의 속뜻은 ‘이스라엘을 향해 느끼는 하나님의 아픔을 해결해 주세요’였다. 그러니 사무엘이 하나님께 바쳐져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 이상할 수 없다. 아니,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군가 하나님 대신(혹은 하나님과 같이) 아파하는 것을 통해 적잖은 위로를 받으시는 듯하다. 아무리 가르치고 혼을 내도 변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두고 하나님이라고 왜 포기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그럴 때 누군가 하나님과 같이 아파하면 힘을 받으시고, 그 포기받아 마땅한 자식을 다시 잘 가르쳐보려고 움직이시는 것 같다. 한나가 그 시기에 하나님처럼 아파하지 않았다면, 사무엘이라는 지도자는 나오지 않았을 수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더 험난한 세월을 겪었을 것이다.


“한나가 하나님과 같은 결의 아픔을 개인의 차원에서 느꼈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공동 사역이 됐다. 그래서 지도자다운 지도자 없었던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얻게 됐다.” 요렇게 묵상했을 때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왜 한나였을까? 한나는 그 사역에 모르고 참여한 걸까, 알고 한 걸까?’


내 성경 지식 깊이가 야트막해 ‘왜 한나였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택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준을 임의로 추측할 수도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 선택’에 대한 이론을 정립할 수도 없다, 다만 그의 주권을 인정한다, 가 나의 믿음이다.


그러면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의 고통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을까? 나는 어느 정도 ‘그렇다’라고 생각한다. 사무엘을 낳은 후 한나가 길게 기도하는데, 그중에 이런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거룩한 백성을 지켜주시며 악한 사람을 어둠 속에서 잠잠하게 하신다.”(삼상 2:9) 자기가 소원하는 아들을 한 명 낳았을 뿐인데, 그 감사기도 중에 ‘자기의 거룩한 백성을 지켜주신다’는 말이 언급되는 건 매우 이상하다. 다만 한나가 자기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을 알았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기도다. 한나가 불굴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마음을 나눈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응답’ 그 자체보다 ‘하나님 마음’부터 나눠주시는 게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하나님 마음’이 그 어떤 응답보다 정확한 응답이다. 결국 한나는 사무엘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응답을 받은 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내가 아무리 하나님과 고통을 나누고 싶다 한들, 한나가 무작위로 선택된 거라면, 나는 그저 운을 바라야 하는 거 아닐까? 글쎄... 하나님께서 고통 공유자로 누구를 택하시든 하나님의 온전한 권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실 정도로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시기에, 그리고 실수가 없으시기에, 누구를 선택하시든 가장 정확할 것이 확실하다.


다만 한나의 경우 그 아픔을 기도로 풀었다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술을 먹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다른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술만 먹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기도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기 전에 고통을 기도로 푸는 데 익숙하고, 기도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이미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주님과 아픔을 나눌 수 있기를 소원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선택될 확률이 높지 않을까? 평소 기도로 주님과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신뢰하고 그 사람에게 자기 아픔을 좀 덜어내실 것 같은데... 그래서 난 요즘 기도로 주님 마음을 먼저 구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묵상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하나님의 아픔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시간 인류의 악행과 죄악을 빠짐없이 지켜봐 오신 분의 아픔을, 여과 없이 내가 심장에 담는다? 바로 죽어 없어지는 것도 모자라 심각히 망가져 가루가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 스케일의 아픔을 감히 인간인 내가 담을 수 없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한나의 경우가 희망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한나가 온전히 하나님의 슬픔을 나눠갖게 하기 위해 인류사를 특별 강연하지 않으셨다. 천사를 통해 그 모든 지식을 한나에게 계시하신 것도 아니다. 그저 여자로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개인적 차원의 아픔만을 허락하셨을 뿐이다.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고통을 나눠갖고 싶다고 소원하는 걸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 한나의 고통이 쉬웠다는 게 아니다. 감당할 만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하나님의 고통을 공유해서 얻는 게 뭐냐는 것이다. 한나가 하나님의 아픔을 공유했을 때 어떤 결과가 있었나 보면 된다. 사무엘이 탄생했다. 이스라엘이 모처럼 제대로 된 지도자를 얻었고,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뀌었다. 즉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의 고통 중 지극히 작은 일부만 나눠가져도 나라가 산다. 한나의 경우 ‘나라’였지만, 이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지구가 살 수도, 심지어 우주가 살 수도 있다. 혜택이 커도 너무 크다.


게다가 사무엘 이후 한나는 더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한 명도 낳지 못해 기도하던 사람이, 얼마나 많은 덤을 얻었는가. 하나님은, 자기와 마음을 나눈 사람들, 특히 나누기 어려운 ‘고통’마저 나눈 사람들을 결코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 갚아주신다. 한나도 하나님께로부터 갚음을 받은 것이다. 내 소원이 몇 곱절로 이뤄지는 기적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의 슬픔을 나눈다면.


하지만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는 걸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나가 사무엘을 바친 후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일생을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기의 슬픔을 하나님의 슬픔으로 일치시킨 그녀의 기도를 봤을 때, 그녀가 사무엘을 낳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 마음에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에게는 더딘 성장을 하는 아이가 한 명 있다. 나의 가장 큰 아픔이다. 우리 가정 전체의 기도제목이다. 어쩌면 우리 가족은, 주님께로 성장하지 못하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요즘 발달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늘어난다고 하던데(정확한 통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세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아픔이 우리 가정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우리 가정이 막내를 품고 같이 아파함으로써 하나님께 힘을 드리고, 그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같은 자들을 세우셔서 수많은 크리스천들의 진정한 부흥과 회개가 이뤄질 수 있다면, 나에게는 그보다 큰 영광이 없을 것이다. 너무나 작은 인풋으로, 너무나 거대한 아웃풋을 내게 되는 것이므로, 그러한 인생은 대단한 흑자를 남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아이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건가요?’라고 묻곤 하는데, 어쩌면 나는 그저 이 아이를 아비로서 품고, 사랑하고, 아파하고, 안쓰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역할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 자체가, 이미 시작된 나의 새 일상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현장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마음껏 아파할 것이다. 더 크게 기도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더 높으신 뜻을 알게 되고, 그 뜻을 내 기도의 언어로 분명히 표현할 수 있게 되기를 구할 것이다.


주여, 저희 가정이 막내를 통해 하나님의 애통을 나눠갖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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