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혐오에 빠졌을 때
부모님과의 관계는 언제나 힘들었다.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랬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는 늘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부모님은 거실에서 싸우다가 방으로 들어가 2차전을 벌이곤 했는데 물건이 날아가는 소리 아버지의 고함 소리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문밖으로 쏟아져나왔다.
어린 시절의 나는 책상 밑에 들어가 자주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곳은 평화로웠다.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세상과 단절된 진공 상태처럼 아무도 날 괴롭히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책상 아래 벽면에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나는 진주조개다." 어릴 때 주말의 명화에서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거기 등장하는 잇지라는 여성은 어릴 적 잃어버린 오빠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깊이 혐오하다가 어느 순간 진주조개에 자신을 투영한다. 자기 혐오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진주가 자기 자신이길 바란다.
<열살 때 우연히 본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출처: AI이미지>
물론 희망사항일 뿐이었지만. 나 또한 내가 진주조개이길 바랐다.
이 글귀를 적어놓았던 게 열살무렵이었으니, 마흔이 넘은 지금 추측해보건데, 그때의 나는 내가 어느 정도 크기인지 얼마만큼 자라날지 어떤 잠재력과 어떤 미래를 가지고 있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막연한, 다만 희망만을 품은 그런 존재였다. 남들이 날 진흙으로 바라보니 그 깊숙한 곳에 진주조개가 있기를 바라는 그런 희망이 내가 가진 한줄기 힘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가스라이팅 하면서도 내가 집의 음습한 곳에 적어놓은 이 글귀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한 줄이 내가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힘이었음을, 힘들 때마다 기어들어가 읽고 또 읽으며 스스로 외웠던 주문이었음을 말이다.
내가 부모가 되고보니 부모가 아이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젠 알 것 같다. 아이들은 모른다. 자신들이 얼만큼 성장할지. 어떤 잠재력으로 얼만큼의 꿈을 꾸는 게 가능할지. 혹은 그 꿈이 진짜 현실이 되는 것이 가능할지. 부모는 아이들을 불러준다. 이름 외의 어떤 존재로. 그 존재는 즉 그 아이가 된다. 꿈을 현실로 이룰 수 있는 아이, 한계없이 성장할 수 있는 아이, 벽을 깨부술 줄 아는 아이. 부모는 또한 아이를 평가절하할 수 있다.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아이, 부모가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 분수도 모르고 까부는 아이. 아이를 형성하는 건 부모다. 그건 부정할 수가 없다.
부모님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그 이유를 잘 알지는 못한다. 경제적 문제는 없었다. 아버지는 비교적 돈을 잘 벌어왔다. 지금에 와서는 그들이 싸웠던 이유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겠다. 어떤 환경이었어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저 그 사람(아버지) 자신이 이유였고 누구와 함께했든 그렇게 귀결될 수 없었다. 그저 그 나르시시즘이 필연적 이유였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비로소 투명하게 보인다. 그토록 애를 쓰며 문제를 해결하기 애썼던 시간들은 무의미했다. 어쩜 내가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우리 집의 불화의 이유에 죄책감을 가졌던, 그 모든 시간은 사실상 필요하지 않았던 시간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나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은 우리 자신이 문제라고 느꼈고 우리에게서 그 원인을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 점점 자기 혐오에 빠져들었다. 동생은 나와 같은 글귀를 자신만의 공간에 적어놨을까. 성인이 된 뒤 나와는 다른 패턴으로 고통을 겪어온 동생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아리다. 죄책감도 든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우리가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하물며 서로에게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유달리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든 지 아니?"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늘따라 안색이 창백하다는 이유로 옆집 아이에 비해 키가 자라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랑할만한 성적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 어머니는 건강식을 차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짠 국을 끓였다는 이유로, 옆집 아줌마에 비해 늙어보인다는 이유로, 밖에서 교양있는 언어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 우리는 숨쉬는 매 순간마다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
숨쉬는 것을 멈추기 전에 아버지를 힘들게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완벽한 아버지(표면적으로는 돈을 잘벌어오는)를 곤란하게 만드는 '우리'라는 존재들.
우리는 참으로 쓸모없는 존재였고, 어쩌다 세상에 생성되었지만 사실은 생성되지 말았어야 하는 불량품이었다. 아버지를 조금 더 자랑스럽게 만들지 못하고, 아버지의 어떠한 완벽함에 닿지 못하는 아내로서의,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못생기고 못난 존재.
어린 시절 동안 나는 한번도 그것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나는 참으로 못난 존재였다.
늘 죄스러웠다.
내가 죄스러움을 느끼는 동안 아버지와 큰 불화는 없었다.
아버지가 보기에 나는, 못난 존재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못남을 바로 알고 있고 아버지에게 죄스러움을 느끼고 더 완벽해져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는, 부족하지만 생각은 올바로 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나에 대해선 적당히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늘 순응했고 늘 인정했고 늘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적 종교였다. 아버지는 신앙이었다.
중학교 때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그 생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