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지인과 식사를 하면서 기구한 사연을 듣게 되었다.
그 어느 집보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그 분은, 어릴적부터 형제 중 유일한 아들이었던 막내 동생의 서포트를 알게 모르게 강요받았다고 한다. 문학을 전공하고 싶었던 그녀는 집안의 경제 형편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공부 대신 2년제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빠른 취업이 보장되는 직업이었으므로 꽤 안정적인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돈의 일부는 꼬박 동생의 교육비로 결혼 자금으로 주택 구입비로 평생에 걸쳐 지급되어왔다.
1990년대 드라마 아들과 딸에나 나올법한 사연이다. 허긴 그 분이 나보다 나이도 열 살 이상 많고 비교적 현대화가 덜 된 지역에서 자라났으며 집안이 전근대적인 분위기였다고 하니 귀남이 후남이가 나오는게 (주위와 비교컨데) 매우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은퇴한 그녀는 지금까지도 동생의 후원자로 살고 있다고 했다. 오랜 직장 생활 끝에 연금이 나오긴 하지만 그 일부를 지속적으로 동생에게 쪼개줘야 하는 생활이란 나로썬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사람이 얼마나 착하면 이렇게 이타적일 수 있는 것인가.
밥을 먹으며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는 그녀에게 나는 크게 동요했지만 이런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것은 잘못된 관계가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지속된 일이기에 마음 속의 고통 뿐 아니라 안정감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인지라 쉽게 끊어내기가 힘든 것처럼 보였다. 끊어냈을 때 닥칠 후폭풍과 (잘못된 모양이나마) 특정한 형태로 빚어진 하나의 틀이 깨어지는 순간은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극대화된 피로함을 수반한다.
그럼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경제적 서포트에 대해 동생은 고마워 하는지?
동생의 경우는, 자신이 요구한 것이 아니기에 고마워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한 서포트를 요구한 건 자신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고마워하는지? 자신의 딸이 인생을 희생하며 동생을 서포트하는 삶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하긴. 덜 해준 것에 대해 서운해하기만 하지. 왜 이건 안해줬냐. 왜 저건 안해주냐. 왜 너만 좋은 옷 입냐. 맨날 그런 식이야."
"당장 관계를 끊으면 안되나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남의 인생에 대해선 쉽게 왈가왈부할 순 없다.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님 밑에서 스케이프 고트(희생양) 역할을 도맡아 살아왔던 난, 지금 돌이켜보건데 아주 못된 성격의 소유자였다. 시쳇말로 성격이 "지랄맞아서" 때때로 강요되는 어떤 "역할" 앞에 계속 반기를 들었다. 내가 왜 동생을 위해 그것을 해야 하냐, 왜 당신들은 동생에게만 그런 서포트를 해주냐, 동생은 저런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왜 책임지지 않냐. 이런 식이었다. 지금에 와선 "지랄맞은" 성격에 감사하게 된다.
전근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일부의 어머니들은 왜 딸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강요했을까. 자신들도 여성이면서...그들도 그러한 환경을 지나왔고 그러한 환경에 순응했기 때문에? 그 틀은 한번쯤 깨어져야 타당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나르시시스트에게서 벗어나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만일 그것이 절연이거나 회색돌 기법이거나 거리두기이거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부당함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생각은 전염성을 가진다. 만일 내가 "지랄맞은"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나를 감싸 안아줄 보호막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르시시스트들은 귀신처럼 이타주의자를 알아본다. 그리고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백지같은 아이들의 생각 스케치북에 원하는 그림을 그려넣는다. 그들이 죄책감을 잘 느끼도록.
관계의 고통은 벗어나야 한다. 가족과의 관계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