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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May 28. 2017

멜로의 클리셰를 배반하다

영화 <브루클린>(2016) 리뷰


영화 <브루클린>을 보고 나는 어느 겨울 저녁의 기억을 떠올렸다. 대학 입학식 전날이었다. 생전 발 들인 적 없는 타지로 나를 배웅하기 위해 나선 가족들과 함께, 내가 지낼 고시원 옆 가게에서 체할 듯 급하게 밥을 밀어 넣었다. 내가 이 도시와 친해질 수 있을까, 하고 공연히 마음이 섬뜩했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영영 닿지 못할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 뒤로 몇 번의 계절이 지나 내 삶의 축은 나고 자란 곳에서 훌쩍 멀어져 영영 원래대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됐다. 이런 변화를 엄마는 ‘배신’이라 불렀고 난 성장이라 여겼다.




 <브루클린>은 수많은 가능성이 약동하던 1950년대를 배경으로, ‘선택’의 문제를 화두로 꺼내든다. 주인공 에일리스(시얼샤 로넌)은 고향 아일랜드를 떠나 이민자들이 밀려들던 미국 브루클린에 갈 기회를 마주한다. 조건은 썩 괜찮다. 말씨가 좀 다르긴 하지만 영어를 사용하고, 핏줄이 같은 사람들이 정착지의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다소 무례하나 동향의 정서를 공유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다. 1950년대에 미국 땅을 밟은 다른 이민자들에 비해 훨씬 나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가 그리는 이 아일랜드 출신 여성의 뉴욕 이주기는 일견 지나치게 안전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브루클린>은 에일리스에게 하사된 안온한 행운과 현실의 간극에서 느껴지는 미심쩍음을 완전히 내버리지 않는다. 브루클린의 아일랜드 인들이 휘두르는 횡포에 대해 항의하는 토니(에모리 코헨)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섞어 넣고, 카메라는 북적이는 출근길 횡단보도에 선 에일리스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사람들을 은근슬쩍 비추는 식이다.


 브루클린에서 에일리스는 종교와 가족의 울타리가 공고했던 고향에서의 삶을 점차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다. 수영복의 색깔이나 마음에 드는 선글라스를 자연스레 고를 수 있게 되고, 세련된 복장을 갖추는 한편 사교 화법에도 능숙해진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이주민 남자와 관계를 시작하고 파트너십을 계획하기도 한다. 숱한 조건과 그에 뒤따르는 선택을 가릴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중후반부, 언니의 부고를 접하고 고향에 다시 방문한 그녀는 개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선택을 목전에 둔다. 고향에서 새로이 만난 남자 짐(돔놀 글리슨)에게 낭만적인 흥미를 갖고, 어머니와 친구들, 익숙한 동네, 롱아일랜드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쾌청하고 멋진 해변과 재회한 순간 갈등이 시작된다. 귀향할 것인가? 브루클린에 남을 것인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선택이다. 



 결정은 아주 의외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에일리스가 ‘한 이탈리아 남자’와 모종의 연애 관계를 맺고 있음을 전해 들은 그녀의 옛 고용인은 기다렸다는 듯 꼬투리를 잡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과장된 물음엔 마을과 자신의 권위 앞에 고개 숙이기를 바라는 음험함이 배어 있다. 그녀는 단번에 악의를 알아챈다. 외지로 나간 여성에게 따라붙는 전형적인 폄하 앞에서 에일리스는 눈물을 터뜨리거나 순종하듯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대신 분노를 터뜨린다. 세련된 차림새를 하고 나섰다가 “아주 멋쟁이라니까.” 하는 비아냥거림을 들어도, 고개를 슬그머니 숙이며 선글라스를 벗는 대신 고개를 뻔뻔히 더 드는 여자가 됐다. ‘미국 사람인 것처럼 생각해’, 스스로 새겨먹은 굳은 마음에 에일리스는 미국인이 됐다. 


 그 순간 이후 에일리스는 고향에 남는 것으로 기울던 마음을 단번에 고쳐먹는다.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떠난다. “내가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당신이 알려줬어요.”라는 한 마디를 던져 놓은 채로. 이는 단순히 연애 상대를 고르는 일을 넘어 삶의 방식을 결정한 것에 가깝다. 그의 선택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브루클린>이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쓴 성장담으로 읽히는 이유는 이 지점에 있다. 



 에일리스는는 신중하고도 이기적이며 단호한 선택을 한 후 이를 감당한다. 떠나는 에일리스를 두고 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울며 마주 안으면서도, 결코 배편을 취소하지 않는 장면은 에일리스의 성장을 요약한다. 그는 고향 땅의 덕과 악덕을 고루 직시한다. 훤칠하고 자상한 남자와 아름다운 해변, 언뜻 자애로워 보이는 아일랜드의 미덕만으론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된 에일리스는 스스로의 변화를 자각한다. 영화 <브루클린>은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에서 빠져나와 삶을 한 뼘씩 넓혀 나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부드럽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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