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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May 31. 2017

머뭇거려도 괜찮아

영화 <문라이트>, <미녀와 야수>, <토니 에드만> 리뷰


3/10

<문라이트>는 머뭇거림에 시간을 할애하는 영화다. 어린 샤이론(알렉스 히버트)은 말이 없다. 호의적인 태도로 먹을 것을 사 주고, 집으로 초대하는 후안(마허샬라 알리)의 질문에도 선뜻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소년의 침묵은 낯선 이에 대한 적대감이라기 보단 머뭇거림에 가깝다. 그는 또래보다 오래 망설일 뿐이다. 샤이론에게는 그의 머뭇거림을 이해하는 두 부류의 친구가 있다. 후안과 테레사(저넬 모네이)는 서두르거나 강권하지 않고 샤이론이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곁에서 바라봐 주는 어른 친구다. “제가 게이인가요?”라고 묻는 샤이론에게 이 따뜻한 어른 친구들은 쉽게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할 수 있는 가장 사려 깊은 대답을 돌려준다.



후안과 테레사가 소년이 충분히 머뭇거릴 수 있도록 한 발짝 떨어져 그를 지켜보는 친구였다면, 조금 더 가까이 샤이론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케빈(안드레 홀랜드)이다. 그는 머뭇거리던 소년을 두드리고 만진다. 욕망을 일깨우는 것도, 인정하기 전에 ‘느끼게’ 해 주는 것도 케빈이다. 샤이론의 머뭇거림은 긴 시간을 건너와 마침내 언어로 치환된다. “날 만져준 건 네가 처음이야.” 이는 분위기를 타고 느닷없이 뱉어진 고백이 아니다. 그가 ‘리틀’이었던 시절부터 그를 ‘블랙’이라 불러줬던 케빈 앞에서, 샤이론의 오랜 머뭇거림이 끝났을 뿐이다. 고백이 발화되는 순간의 덩치 큰 사내는 왠지 ‘리틀’처럼 보인다.     



3/20

<미녀와 야수>는 놀라운 수준으로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구현한다. 화려한 화면과 풍성한 음악이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성 안의 물건들이 벨을 환영하며 부르는 <우리의 손님이 되어주세요(Be Our Guest)>이르러서는 극장 안 곳곳에서 탄성이 터질 정도였다. 시각적 효과 면에서는 확실한 성공이다. 


그렇다면 인물 면에서는 어떨까. 수동적인 그간의 공주 캐릭터들에 대한 비판을 의식하기라도 한 듯, 디즈니는 주인공 벨 역할에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엠마 왓슨을 캐스팅했다. 실사 영화 <미녀와 야수>에서 책을 사랑하고 발명을 즐기는 씩씩한 벨(엠마 왓슨)은 원작보다 씩씩하고 행동력 있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세탁기를 발명해 빨래할 시간에 책을 읽고 학교에 가지 못하는 소녀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구체적인 에피소드 속에서 벨은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외치던 배우 엠마 왓슨 그 자체로 보인다. 


때문에 야수와 벨의 사랑이 주는 애절함은 다소 옅게 느껴졌다. 야수를 바라보던 순간보다는 야수의 서재를 보고 감탄하던 벨의 눈빛이 더 사랑에 가깝게 보였다면 과장일까. 극장을 나서며 누군가가 던진 우스갯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엠마 왓슨은) 저 성에 있는 책 다 읽으면 미련 없이 떠날 거 같은데.”     



3/25

<토니 에드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를 빈프리트(페테르 시모니슈에크)가 마주하는 장면이었다.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어려워하는 상태를 온몸으로 표현해내는 연기에 감탄했다. 완전히 비굴하거나 드러나게 사랑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어색한 상태. 최선을 다해 가까워지려는 아버지와, 최선을 다해 멀어지려는 딸의 몸짓은 마치 콩트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마렌 아덴 감독은 특유의 코미디 감각으로 이 기묘한 가족극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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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파이트>와 <로건>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이 됐다. 엑스맨 시리즈의 일환인 <로건>과 CBS 드라마 <굿 와이프>의 스핀오프작 <굿 파이트 >는 트럼프 시대를 맞은 사람들의 절망을 꽤 적나라하게 은유한다.  <로건>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뮤턴트 로라(다프네 킨)은 멕시코 출신이다. 폐쇄된 연구소에서 인간 병기로 길러진 ‘이민자 뮤턴트’들은 국경을 넘어 ‘에덴’으로 탈출한다. 엑스맨 시리즈 세계관이 국경을 한 뼘 더 넓힌 셈이다. 트럼프의 이민자 정책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굿 파이트>는 도널트 드럼프의 대통령 취임식 장면을 지켜보는 다이앤 록하트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오프닝을 연다. 힐러리의 열혈 지지자이자 민주당원, 백인 전문직 여성이었던 다이앤은 은퇴 선언을 하자마자 뜻밖의 사건에 휘말리며 파산한다. 돈 있는 의뢰인들을 대변하던 그녀는 흑인들로 구성된 로펌에서 일하며 전혀 다른 상황을 맞닥뜨린다. 가짜 뉴스, 경찰 폭력 등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다루며 드라마 <굿 파이트>는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정면으로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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