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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Jun 01. 2017

자신의 윤리로 화답하다

영화 <사울의 아들> 리뷰

<사울의 아들>의 배경은 1944년, 나치 집권기 아우슈비츠의 시체 소각장이다. 주인공 사울(게자 뢰리히)은 유대인 포로인 동시에 부역자로, 독일군의 지시에 따라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안내하고 시체를 처리하는 ‘존더코만더’이다. 그는 수많은 주검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라 스스로 생각하는)의 시신을 발견하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움직인다.


사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으며, 그는 어떠한 언어도 표출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 앞에 모자를 벗고 예의를 갖추지만, 그의 몸짓은 사회적 사고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닌 기계적인 복종에 가깝다. 우리는 카메라가 현시하기 이전에 이루어졌을 숱한 학대가 그를 현재의 사울로 만들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는 죽음과 바싹 붙어 있다. 그의 몸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안내하고, 죽음을 거쳐 ‘토막’이 된 몸들을 처리한다. 영화 말미의 대사처럼 사울은 ‘이미 죽어 있다.’ 어쩌면 그는 숨을 쉰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수용소에 널브러져 있는 토막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사울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은 그가 무언가와 ‘마주 본’ 다음이다. 그는 군의관이 죽어가는 소년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을, 사람이 ‘토막’이 되는 과정을 처음으로 지켜본다. 이에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소년을 장사지내기 위해 그를 위해 기도해 줄 랍비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영화의 플롯은 단순하다. ‘소년을 장사 지내겠다.’고 하는 사울의 욕망이 밀어붙여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고 달아난다. 그는 무모할 정도의 시도 끝에 기어이 랍비를 찾아 소년의 시신과 함께 수용소를 탈출하지만, 랍비라 자칭한 이는 사실 랍비가 아니었고 소년의 시신은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소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랍비를 찾는 사울의 행위는 매우 아이러니하다. 신이 없는 공간, 신에 의해 선택받았다고 믿었던 민족이 몰살당하는 공간에서 자신을 버린 신의 규칙을 따르는 일은 얼마나 허망한가. 때문에 이는 한 미친 자의 질주로도 읽힌다. 정말 자신의 아들인지 명확 치도 않은 이를 종교적 의례에 따라 땅에 묻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나아가 동료들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사울의 행위는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울의 행위에는 그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반영되어 있다. 동시에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라는 공간을 카메라에 담을 때 필연적으로 빚어지는 스펙터클 대신 애도의 방식을 찾는 데 몰두한다는 점에서, 그 자신만의 윤리를 가진다. <사울의 아들>은 마치 ‘어떻게 감히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구경거리, 혹은 장르적 쾌감을 빚어낼 수 있느냐’ 하는 도의적 물음 그 자체를 거부한다는 듯이, 아우슈비츠를 다루는 어려움에 대해 알면서도 사울의 서사를 끈기 있게 내세운다. 



영화가 사용한 기법 중 하나인 아웃 오브 포커스(Out of focus)는 이 고집의 일환이다. 포커스 아웃된 화면, 사울을 중심으로 한 카메라 워크가 과학적인 선택이라고 했던 송형국 평론가의 의견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이는 스펙터클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죽어버린 사울의 영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카메라가 켜지기 이전에 사울의 영혼은 애초에 죽었다. 그는 견디지 못했고, 그의 영혼은 살아남아 탈출할 계획을 세웠던 다른 존더코만더의 그것보다도 일찍 사그라졌다. 다만 소년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 정념에 몰두해, ‘소년을 위해 장례를 치른다.’는 목적을 향했을 뿐이다. 


사울의 행위는 불완전하며 비사회적이다. 공동체와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공동체를 위협한다. 소년을 장사 지내는 일은 수감자들이 받드는 생존과 탈출이라는 최우선 가치와 거리가 멀다. 장례식이라는 지극히 사회적인 의례가 아우슈비츠에서는 몹시 비상식적인 해악이 된다는 사실이 그 참혹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아우슈비츠 내에는 윤리가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우슈비츠는 윤리를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한 공간으로, 그 안에서는 죽음을 코앞에 둔 토막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발버둥 칠뿐이다.


누군가는 탈출을 꿈꾸고 누군가는 참담한 수용소의 광경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 적에, 사울은 자신이 본 ‘토막 아닌 것’을 ‘토막 아닌 것’의 방식으로 고별하기 위해 뛴다. <사울의 아들>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기본 명제조차 파괴된 공간에서 어떤 사유도, 행동도 갖지 못한 자가 비로소 이를 깨치는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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