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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Jun 01. 2017

공포 체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내 인생의 영화 <장화, 홍련>(2003)

친구들 사이에서 난 배짱 있는 애로 통했다. 초등학교 3학년 걸스카우트 캠프에서 영화 <가위>를 보다 거의 까무러쳤던 아이들 사이에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영화를 끝까지 본 일화 덕이었다. 같이 고함을 지르는 게 폼이 안 날 것 같아서 참은 거였지만, 한 번 형성된 이미지는 실제보다 그럴듯한 이름표가 됐다. 


나는 이야기를 쫄깃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꼬마였다. 무서운 이야기를 잔뜩 모아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재미로 밤마다 공포 커뮤니티를 뒤져댔다. 베란다에 턱을 괴고 있던 귀신이 양팔을 움직여 반대편 베란다로 건너오는 이야기부터, 새로운 버전으로 각색된 빨간 마스크 괴담을 누구보다 무섭게 할 줄 알았다. 덕분에 ‘귀신 얘기 전문가’ 비슷한 걸로 통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우물을 빠져나오던 사다코 이상의 공포는 없으리라 믿던 즈음에, 영화 <장화, 홍련>의 소문을 들었다. “<주온> 귀신보다 더 무섭대.” 나는 짐짓 코웃음을 쳤다. “한국 공포영화는 일본 거에 안 돼.” 입씨름을 하던 우리는 다 함께 ‘엄마 귀신’의 실체를 마주하기로 했다. 비디오가 돌았다. 시작부터 우울하고 스산한 배경음악이 아이들의 기를 죽였다. 후후, 얼마든지 무섭게 해 보라지. 나는 기세 등등한 척 화면을 노려봤다. 그러나 <장화, 홍련>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영화였다.


초점은 귀신이 아닌 곳에 찍혀 있었다. 아빠의 눈을 피해 이루어지는 계모(염정아)의 학대를 견뎌내는 두 자매의 이야기를 따라가던 영화는 말미에 이르러, 이 모든 것이 동생과 엄마를 잃고 미쳐버린 한 소녀의 정신 착란기였음을 폭로한다. 수미(임수정)의 분리된 자아였던 계모가 던지는 말은 영화의 핵심을 담아낸다.


“너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뭔가 잊고 싶은 게 있는데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은 게 있는데,
도저히 잊지도 못하고 지워지지도 않는 거 있지.
근데 그게 평생 붙어 다녀 유령처럼.”

삐걱거리는 목조 건물의 스산함이나, 잠든 수미 위로 덜컹거리며 다가오는 엄마 귀신(박미현)보다도 무서운 대사였다. 


지극한 비극일수록 그 속에서 명확한 인과를 찾아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와 동생을 잃은 소녀가 이 모든 사태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는 모든 순간을 복기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나는 무엇을 잘못한 걸까. 수미가 두려워한 건 귀신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자신의 작은 실수, 혹은 불운이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빚어냈다는 것, 그 순간이 기억 속에서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끔찍함에 그는 고통받았다. 귀신과 귀신 아닌 것으로 나뉘었던 나의 공포 개념에 균열이 온 순간이었다.


날 선 현악기의 음과 함께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마음이 이상한 모양새로 울렁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귀신 이야기에 시들해졌다. 무섭지도 재밌지도 않았다. 귀신에 집착하던 나의 어린 시절의 한 장은 그렇게 넘어갔다. 대신 증오와 애정, 불운이 빚어내는 비극에 매료됐다. 비슷한 해에 개봉했던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가 ‘귀신’의 배턴을 터치받았다.



중고교 시절은 느리고 버겁게 흘렀다.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누군가 내 허리에 추를 매달아 놓기라도 한 것 같았다. 모르는 새 턱 밑까지 당도해 있는 선연한 악의 같은 것들이 손바닥을 찔렀고 인과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어제까지 마주 보고 웃던 친구가 다음 날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설 때, 혼자 보낸 스물네 시간과 함께 보냈던 세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어 복기했지만 답을 찾지 못해 허우적댔다. 의도하지 않은 관계의 단절과 무방비한 이별을 맞을 때마다 <장화, 홍련>을 돌려봤다. 끝내 비극으로 닫히는 이야기가 나를 어떤 방식으로 위무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 한바탕 울고 나면 마음이 한결 나아지곤 했다.


요즘도 가끔 이 영화를 본다. 여전히 볼 때마다 서글픈 이야기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흘러나올 때마다 몸에 밴 것처럼 짠 기운이 혀 아래로 스민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귀신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던 순간이 영화를 타고 내게 왔던 것처럼, 누군가의 악의나 인과 없는 비극을 덜 두려워할 수 있는 때가 올까. 영화를 천 편쯤 더 보면 또 한 번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가능할까. 


아마 그럴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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