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칼라수녀님이 사는 방법
강 칼라 수녀님을 만난 날은 ‘111년 만의 더위’라는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길눈이 어두운 내가 어렵사리 찾은 고창 동혜원 공소 앞에서 ‘맞게 왔는지’를 가늠하며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푸른 눈의 수녀님이 걸어 나오셨다.
강 칼라 수녀님.
그 해 7월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수상하신 이탈리아인 수녀님이다. 더위가 비껴간 듯 한 수녀님의 평화로운 미소에 곤두선 내 표정이 슬그머니 누그러졌다.
한센인들은 수녀님의 수도명인 ‘카렐라’를 부르기 편하게 ‘칼라’라 불렀다. 한 한센인이 자신의 ‘강’씨 성을 받아달라고 요청해서 수녀님의 이름은 ‘강 칼라’가 되었다. 그 이름에는 수녀님을 바라보는 한센인들의 마음이 환히 드러난다.
‘친구’
강 칼라 수녀님은 한센인들의 친구였다.
칼라 수녀님은 자신의 봉사를 Minimission(작은 사명)으로 설명했다.
“저희 수도회 정신이 개개인별로 만나서 하는 봉사예요. 어려운 환경에 있는 분들에게 가서 가족처럼 친구처럼 함께 사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서로 우정, 신뢰의 관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수녀님은 작은 사명을 수행하며 평생 소외된 이들의 친구로 살았다. 한센인 마을에서, 복지원에서, 빈민촌에서, 교도소에서, 무료진료소에서, 성매매 피해 여성들 옆에서 강 칼라 수녀님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였다.
수녀님의 수도명 ‘카를라’는 오빠의 세례명 ‘카를로’에서 왔다. 부제였던 오빠는 사제서품을 앞두고 사고로 사망했다. 오빠의 사고사 몇 달 후 칼라 수녀님은 한국으로 왔다. 1968년 강 칼라 수녀님 나이 26살 때였다. 당시 4남매 중 언니는 같은 수도회 소속으로 활동 중이었다. “오빠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부모님을 두고 떠나는 게 마음 아팠습니다.”
칼라 수녀님의 한국과의 인연은 수녀님 일곱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6.25 전쟁을 겪고 있던 한국의 참상을 TV 뉴스로 처음 접했다. 무솔리니 정권을 겪어본 칼라 수녀님에게 전쟁의 두려움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두세 살 경에 들었던 총소리와 지하 피신 생활의 기억은 칼라 수녀님에게 전쟁의 어려움을 겪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1962년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에 입회하여 전쟁고아를 돌보던 칼라 수녀님은 1968년 적극적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당시 고창 동혜원 공소에서 소임 중이었던 서 이멜다 수녀가 교육차 이탈리아에 나왔다가 한국으로 귀국하며 함께 한국에서 봉사할 동료를 찾았다. 한센인들이 많다는 이야기와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한국에 대한 관심은 칼라 수녀님에게 즉시 한국행을 자원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칼라 수녀님이 첫 발을 디딘 곳이 고창의 동혜원 공소, 지금의 호암마을이다. 1940년대 생긴 한센인 정착촌이었던 동혜원 공소는 ‘한센인 마을’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기 위해 후에 마을 뒷산에 있는 호랑이 모양의 바위를 뜻하는 호암마을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칼라 수녀님은 초창기 호암마을에서의 어려움을 이렇게 기억했다. “약이 귀했어요. 어렵게 약을 구해왔는데 정작 한센인들이 약을 잘 먹지 않는 거예요. 당시 한센인들은 땅을 개간하고 하루 종일 노동하느라 약 먹는 것도 귀찮아할 만큼 힘들게 살았어요. 그때 치료를 너무 늦게 시작해 다리 절단 진단이 나온 한센인이 있었어요. 다리를 절단하면 생활이 너무 힘들어지니까 제가 수술 말고 비타민 치료를 하자고 주장했어요. 수술 없이 치료하자면 기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동안 의사와 환자를 설득하고 용기를 줄 일이 걱정이었죠”
치료는 4년이 걸렸지만 환자는 다리 절단 없이 회복할 수 있었다. 환자의 처지를 깊이 생각하고 공감하지 않았다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에 대해 물었다.
“유난히 잘 따르던 복지원의 한 형제님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맸어요. 8월 복중이었는데 당시엔 선풍기도 없었어요. 환자가 통증과 더위로 너무 고통스러워하는데 해 드릴 수 있는 게 부채를 들고 부쳐드리는 것 밖에 없었어요. 2시간 넘게 부채로 부쳐드리니 저도 덥고 너무 힘들었어요. 나중에는 부채를 든 손이 잘 안 움직여지더라고요. 그때 그 환자가 저를 쳐다보더니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돌아가셨어요. 신자도 아니었는데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 함께 한다’는 것을 체험하고 돌아가신 거예요. ‘감사하다’라는 그분 말씀이 지금도 어려울 때마다 용기를 불러일으켜주곤 해요.”
한센인 치료와 더불어 힘들었던 것은 자녀들의 교육이었다. “한센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해 당시 한센인 자녀들은 학교에 입학을 못했어요” 그래서 칼라 수녀님은 초등학교 분교를 세우고 살레지오 야학에 입학을 시켜 한센인 자녀들에게 교육의 문을 열어 주었다.
강 칼라 수녀님은 2016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2018년에는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고 상 받을 엄두가 안 났어요. 수도회 정신에 따라 평범하게 살아왔을 뿐인데요.” 칼라 수녀님은 국민훈장 수상은 한사코 사양하다가 세상의 사각지대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분들을 대신해 받는다는 마음으로 수상을 허락했다.
호암상 수상 후에 여러 통의 전화를 받았다. 격려와 위로, 칼라 수녀님에 대한 신뢰의 전화였다. 신앙을 잠시 내려놓았던 신자에게서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결심도 전해져 왔다. “얼마 전 읍내 우체국에서 만난 한 아저씨가 ‘수녀님, 여기서 50년 동안 잘 살았으니까 여기서 잘 돌아가세요’라며 말을 걸어왔어요. 저를 가족처럼 대해주는 말씀이다 싶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작은 사람들에게 가서 작은 사람이 되어 몸을 낮추며 살아온 칼라 수녀님의 수상 소식은 종교계를 떠나서도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이었다.
칼라 수녀님은 한국에서 50년을 살며 할머니 수녀가 되었다. 그동안 복지원과 빈민촌, 교도소, 무료진료소, 달동네에서도 살았지만 한국에서의 50년 살이 동안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한 곳은 고창의 동혜원 공소, 호암마을이었다. 수녀님에게는 또 하나의 고향인 셈이다. 지금의 호암마을은 한센인의 흔적은 사라지고 70 ~ 80대 어르신들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젊어서도 나이가 들어서도 칼라 수녀님의 시간은 변함없이 바쁘게 지나간다. 수녀님에게는 호암마을 어르신들의 뒷바라지가 제일 중요한 일과이다. “할머니들 모시고 병원에 같이 가요. 장날엔 장구경도 함께 가고요. 다 혼자 사시니 외로운 걸 힘들어하세요.”
공소 봉고차도 직접 운전한다. 고령의 칼라 수녀님이 운전하는 차를 공소 어르신들은 더 든든해한다. 가족이고 친구이며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눈 사이이기 때문이다. 동네 어르신들 병시중과 은행일, 관공서일 모두 칼라 수녀님의 몫이다. 이런 수녀님을 고창 읍내에서는 ‘천사할매’라 부른다.
인터뷰 내내 평화의 미소를 잃지 않는 칼라 수녀님에게 변함없는 봉사의 비결에 대해 물었다. “모든 일은 스스로 선택해서 해야 돼요. 당하게 돼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면 그 일은 무거울 수밖에 없어요.” 수녀님은 20kg 쌀을 스스로 어깨에 지면 가뿐히 갈 수 있는데 누군가 시켜서 억지로 끌고 가면 무거울 수밖에 없는 비유를 들어 봉사의 삶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가벼워질 수 있음’을 설명했다.
그렇게 기쁘게 선택한 봉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었던 성경말씀은 무엇이었을까?
“한 평생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는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주신 것, 거저 받은 것을 나누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70~80대 홀몸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호암마을엔 도움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다. 칼라 수녀님과 함께 생활하는 한국인 우을리 수녀는 “어르신 신자 공동체와 함께 할 봉사자를 기다린다”며 기쁨으로 섬김의 삶을 선택할 봉사자에 대한 희망을 전했다. 공소 옆엔 봉사자를 위한 작은 숙소도 마련되어 있었다.
서둘러 자리를 떠났던 칼라 수녀님이 어느 순간에 양손에 간식을 들고 나타났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이 피부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필요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남김없이 주면서 매년 연말이면 통잔 잔고가 ‘0’이 된다는 칼라 수녀님의 삶이 짧은 순간에 명료하게 이해됐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동행했던 지인들이 호암마을 안에 있는 피정센터와 명상의 집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을 전해왔다.
50여 년 전 한센인들에게 치유의 공간이었던 호암마을은 이제는 누구든 와서 쉬며 하느님을 만나는 회복의 공간으로 재탄생되고 있었다. 2018년, 그 해 들어 가장 더웠다는 여름 한 나절도 그렇게 칼라 수녀님과 함께 하는 평화의 시간으로 나에게도 재탄생되었다.
(이 인터뷰 기사는 2018년 쌍백합 가을호에 실린 것을 재편집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