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댁 거실에는 낡은 괘종시계가 있었다.
부지런히 똑딱거리며 추를 움직이던 시계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성실한 삶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러다 한 번씩 종이 울리곤 했다. 매 시간마다 종이 울렸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반응하는 것은 하루 3번의 종소리였다.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 하루 세 번 삼종기도 시간의 종소리였다. 종이 울리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떤 일이든 즉시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십자 성호를 그으셨다. 어린 나이에 바라본 괘종시계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는 절대 강자였다.
나에게는 익숙한 그 모습이 남편에게는 몹시도 생소한 모습이었다. 결혼 전, 방문한 할아버지 댁에서 이야기 도중 벌떡 일어나 기도하시던 두 분의 모습은 군에서 세례를 받고 무늬만 신자로 살아온 남편을 쩔쩔매게 했다.
또 하나의 강렬한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가 친구 분과 나누시던 대화이다.
집을 방문한 할아버지 친구는 당시 시청률이 높던 인기 프로 ‘쇼 쇼 쇼’를 시청하고 계셨다. 가수 옆에는 무용수들이 꽤나 요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친구분은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할아버지에게 “요한 형제님, 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하느님이 보시면 좋아하실까요?”라고 한마디를 던지셨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이 질문이 참으로 이상했다. 텔레비전을 보며 하느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것이었다.
“춤은 춤이고 노래는 노래인데 왜 여기서 하느님 이야기가 나올까? 하느님 이야기는 성당 주일학교에서나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아직도 이 질문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을 보면 당시 내가 인식하는 신앙을 훌쩍 뛰어넘는 차원의 그 무엇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들어가며 할아버지 친구분이 했던 이 질문을 많이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이 좋아하실까?’
다르게 살고 싶거나 답이 나오지 않을 때 이 질문을 생각해보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가? 하느님이 좋아하는가?’의 분별이 신앙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아갔다. 성당에서 ‘좋은 영화 상영’을 맡아서 할 때 ‘대중문화 속 복음 찾기’라는 키 워드는 바로 그 질문, ‘하느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실까?’라는 물음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규칙적으로 기도하기,
모든 일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기’
이것이 내가 할아버지에게 배운 신앙이다.
이제 두 손주를 보게 되니 내가 전해줄 신앙의 무게를 느낀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통해 아버지 어머니에게로 전해진 신앙의 유산을 잘 전해주어야 할 신앙의 책무이다.
두 손주의 육아를 돕게 되면서 밥 한 끼 먹기도 전쟁을 겪는 듯하다. 식사 전 후 기도조차 잊고 넘어갈 때가 많다.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는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일상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인류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권하신 기도문이 있다. “나에게 오래된 기도가 하나 있습니다. 이 기도는 로사 할머니에게 배웠습니다.”라며 권하신 기도문은 “예수님, 제 마음을 당신과 닮게 만들어 주소서”라는 기도였다. 대를 이어 전해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기도에서 신앙유산의 정수를 본다.
교황님께서 로사 할머니에게 배우셨던 기도를 나도 손주를 안고 바친다.
예수님, 제 마음을 당신과 닮게 만들어 주소서,
예수님, 우리 인류의 마음을 당신과 닮게 만들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