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할 때가 있다.
소중한 인연.
우리 둘째를 출산하고 시작된 조리원생활.
한. 중. 일 세 나라의 엄마들이 만났다.
공용어는 영어여야 했다.
매일 아침 미역국에 식사를 하고 방에 올라가 쉬고 있으면 전화가 울린다. 수유실에 내려가 수유를 하고, 방에 돌아와서 또 쉬고, 책 보고 TV 보고... 반복되는 시간 속에 점점 사람과 대화하고 싶은 욕구가 높아진다.
신생아를 낳고 보니 궁금한 것들 투성이인데 간호사 붙잡고 대화할 수도 없고 수유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기도 하고 그렇게 눈으로만 나누던 인사가 진짜 인사를 나누게 되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사실 외모만 보고는 한국인줄 알았기에 거침없이 말 걸었는데 발음이 어눌한 일본인. 아뿔싸...
일본인 친구와 이미 친구가 되어있었던 중국인. 그렇게 나포함 세 나라의 엄마와 다른 한국인 두 명 더해서 모두 다섯 명이 인연이 되었다.
공감능력이 나의 강점이고 보니 내가 만약 타국에 가서 출산을 했다고 생각하면 남편 말고 누군가 말 걸어주면 참 좋을 것 같고, 먼저 다가와주면 좋을 것 같고... 그랬다.
어쨌든 통했던 건지 지금도 모두 잘 지내고 있으면 좋을 테지만 시간과 함께 흩어지고 셋이 남게 되었다.
그 신생아들은 자라서 이제 9살.
중국. 일본 동생들도 한국엄마가 다 되어,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남편이 백 프로 공감해주지 못하는 부분은 우리를 만나 수다로 풀기도 하고 각자 또 다른 엄마들과 관계를 맺어가고...
"한국엄마들 원래 그래요?"블라블라 문화적인 차이인지 그 사람이 그런 건지 너무 힘들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어학원은 어디가 좋아요? 태권도는 어디 보내요? 등등 학원상담도 다녀가며 어쨌든 한국생활 완벽적응 중이었다.
최근에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울려왔다.
택배아저씨일까 생각하며 받았건만,
"Hello~"
'앗, 번호 털렸구나.. 보이스피싱인가?'무응답으로 가만히 기다렸다.
"온니" 어눌한 한국발음에 바로 알아들었다.
나는 영어가 늘지 않았으니 당당하게 한국말로 다다다.
2년 전 중국에 들어가 버린 중국인엄마였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남편이 출장이 잦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일 년 중 반은 친정인 중국으로 반은 한국에 머물며 생활하는 듯했는데, 2년 전부터는 중국을 들어가 버려 코로나로 나오지도 못하고 거기서 아이 학교도 보내고 생활하는 듯했다.
드디어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아이는 두고 갖가지 일처리를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동생은 작년에 우리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더 가까워졌었고 자주 소통을 했었는데, 기쁜 소식은 중국동생도 이번에 와서 우리 아파트에 거처를 마련할 거라는 소식이었였다.
물론 완전거처는 아니고 가끔 다녀가는 한국에서의 거처를 마련해 놓는 거처이지만 가끔 가서 청소도 해주고 관리도 해주겠다며 그냥 왠지 모르게 좋았다.
최근에 한중일 보복성 입국제한 기사를 보면서 확실하게 올 지 안 올지 모르겠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듣긴 했으나 지금 현재 동네까지 입성했다 하니 너무 반가울 뿐이었다.
셋은 오랜만에 만나 나만 안 되는 영어로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 들었지만 어쨌든 당연히 입국 관련 뉴스에서 나오는 소식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번에도 입국할 때 노란색으로 된 목걸이 증을 보여주며 중국인에게만 이것을 목에 걸게 했다며 화가 나 있었다.
수면 위로 떠오른 국책에 대한 한. 중. 일 엄마 셋은 어설픈 결론을 내린다.
"유치해"(한국)
"유.. 쯔.."(중국)"
"요 오치데쓰"(일본)
깔깔. 낄낄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뿐이었고,
이전 거처의 아파트 계약기한이 다되어 다른 아파트의 월셋집을 구해야 했다. 집은 많으니 계약을 했고, 이사센터 예약하기. 한국에서 쓰지도 않고 방치되어 있던 자동차 팔기. 여권업무. 은행업무등등 참으로 벅차보였다.
근데 정보가 없는 동생을 위해 이미 오지랖 출동했다.
우리 아파트라 하니 우리 셋은 집을 같이 보고, 차량은 중고에 올리고, 이사센터 견적 받아 예약하고, 입주청소 예약하고...
이 많은 것을 진짜 해냈다.
안 되는 영어로 중간자 역할을 해내는데...
이 영어는 도대체 언제 끝날 나의 과업이란 말인가...
사람이 좋은데 소통이 이래 답답할 줄이야.
도와준다고 갔는데 반만 도와준 것 같은 찝찝함.
나는 사람이 좋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할 때가 있다.
때로는 이런 점이 나를 큰 구렁텅이에 몰아넣기도 하고 때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또 10년 뒤면 50대 초반일 텐데 그때도 똑같은 말을 반복 파고 있지는 않기를..
아시아계 한중일 역사로 돌아가면 나의 얕은 지식으로는 설명 밖의 영역이지만 우리 셋처럼 끈끈한 역사를 잘 이어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