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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공리셋 Feb 08. 2020

유학(留學)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

시집살이를 대체할 방법

나는 서른에 결혼을 했다.

여자 나이로 치면 그렇게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서른.

유학과 결혼 중에 결혼을 선택했더니 지금도 슬프도록 짐 싸들고 비행기 타고 싶은 충동이 자주 든다.

시집살이가 힘겹다 느낄 때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시집살이가 웬 말?

육체적 시집살이가 있고 정신적 시집살이가 있는 것이다.


'결혼은 타이밍!'이라는 말을 경험상 철석같이 믿고 산다.

나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그 눈먼 사랑 앞에서도 결혼을 반대하는 내 엄마의 눈물을 보고 나니 정신이 뻔뜩들었었고, 그렇게 아픈 사랑을 경험하고 나니 나쁜 남자를 걸러낼 줄 아는 뛰어난 식견을 장착하게 되었다.


2010년 부모님이 원하는 신랑감, 나쁜 남자가 아닌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사랑해줄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이제 너도 결혼을 해서 시집을 갔으니 시부모님을 우리보다 더 깍듯이 모시고, 시부모님의 뜻에 따라 친정을 드나들도록 하여라"


조선시대가 아니옵니다. 아빠.

아빠의 말은 한 귀로 들어가 한 귀로 스르륵 빠져나간다.


그런데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눈물 댓바람에 전화통 붙잡고 하소연할 때마다 심심찮게 듣게 되는 말이 되었다.

조금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의 이야기들.


"시부모님 깍듯이 모셔라. 너희 시부모님 같은 분들이 어디 있니?"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이다. 어른들은 다 그렇다"

"엄마 아빠는 생각이 다르지만, 시부모님의 생각과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거다"


'무조건 내편이었던 우리 엄마 아빠는 어디 간 거지?'


난 이미 결혼 10년 차 아이를 둘씩이나 낳은 아줌마임에도 불구하고 짐 싸들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자주 일어난다.

비수같이 꽂히는 시어머니의 말투는 10년째 적응이 안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일주일 만에 안부전화를 드렸더니 첫마디에 대뜸

"니는 결혼 전이랑 결혼 후랑 같은 줄 아나! 가까이 살면서 전화를 자주 해야지!"

"아... 네... 죄송해요..."


또 다른 예로, 시아버님께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에게 술잔을 따르시면서

"며느라 나는 딸이 없어서 큰며느리가 들어오니 참 좋다. 우리 가족인데 딸처럼 생각할게"

시어머님 왈, "딸은 딸이고, 며느리는 며느리지"


10년 전 신혼 때 일이지만 아직도 그 대화가 내 뇌리에 박혀 있는 거 보면 나는 꾀나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시어머님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내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 그 상처 받을 상황을 줄이는 방법 찾아냈다.

시댁과의 물리적 거리를 두기로.

자주 안만나면 다치는 횟수가 줄어들꺼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그 물리적 거리가 5분에서 고작 20분으로 늘어나서 그런지 그렇게 크게 와 닿을 정도는 아니다.

체감하는 횟수가 줄기는 했다.


결혼이 나에게 가져다준 상처도 컸지만, 다른 기쁨들도 컸기에 그럭저럭 버틸만해서 잘 살아왔다.


그런데 자꾸 이전에 선택하지 못했던 유학(留學)이라는 단어가 스멀스멀 꿈처럼 오른다.)


상처 받 내 마음이 더 단단해지는 게 빠를지,

유학(留學)이라는 꿈을 이루는 게 빠를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상처 받은 나를 이전으로 되돌려놓고 싶은 보상심리와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 더 성장하고 싶어 진 나는

10년 동안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유학(留學)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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