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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쪽보단 똑똑합니다

목숨을 다해 철없고 이기적인 '다 큰 자식' 이 되기로 했다.

by 안스텔라

신생아 때부터 눈썹 주변에 붉은 반점이 있었다. 의료인이 진단하기로 시간이 지나면 절로 희미해지는 흔한 피부 질환, 연어반이라고 했다. 지나가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젊은 부모 품에 안긴 아기에게서 연어반을 발견하고는 한 마디씩 보탰다. “아기가 더워서 땀띠가 생겼네.” “저 작은 아기를 겁도 없이 데리고 나왔어.” 이 더운 여름날 아기를 데리고 나오다니, 그러니 땀띠가 생겨버렸지. 참으로 이기적이고 철 없는 부부였다.


생후 40일이 됐을 때 영유아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는 방문 간호사 서비스를 신청했다. 아기의 상태는 흠 잡을 데 없이 건강했고 또래 아기에 비해서도 에너지가 넘쳤다. 간호사는 발달을 위해 자주 외출하고 다양한 소리와 냄새로 자극을 주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집 근처 공원에서 자주 산책을 해 온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의학적 소견과 과학적 근거는 귀기울일 가치가 있었다. 이건 땀띠가 아니라 연어반이라는 겁니다. 자주 나오는 게 아기 발달에 좋답니다. 밖에서 이런 식으로 일일이 대응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만 불쑥 그 비난조가 떠올라 한밤 중에 얼굴 붉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초가을부터는 “아기 춥다!” 면전에 소리지르는 노인들을 만났다. 과장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고함을 쳤다. 중년의 아줌마는 차마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나지막히 혀를 찼다. 아기 손등에 있는 몽고반점을 보고 “추워서 팔이 파랗게 질렸네..” 세상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우연찮게 중얼거린 말이 내 귀에 가 닿았다고 하기엔 조준이 노골적이었고 정확하게 고막을 울렸다. 철없는 부모는 반성할지어다. 아기를 안은 남편은 자신의 가슴에 밀착된 아기가 땀으로 흥건히 젖은 것을 온몸으로 체감 중이었다. 오히려 아기의 체온이 오를까봐 우려했다. 우리가 아기를 통해 무엇을 느끼고 경험하든 마트를 가나 공원에 가나 훈수는 끝이 없었다. 저 사리 분별 못하는 젊은 부부에게 안긴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이 나와 남편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젊은 사람들, 아기한테 그러는 거 아냐.'


지나가는 길에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는 씻지 않은 손으로 갓난아기를 주물럭거리고 싶어했다. 그 자리에서 움찔하기라도 하면 융통성 없고 사회성 부족한 부모가 됐다. ‘애 키우는데 너무 예민해도 안 돼.’ 이쯤 되면 아기의 안위와 위생이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땀을 흘리고 있는 아기지만 추워 보이니까 덮어주어야 하고 땀띠를 닮은 연어반에는 의미없이 연고를 발라주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과학이었다. 만지고 싶을 때 만지게 해 주는 부모가 도리를 다하는 현명한 부모고. 도대체 어떤 류의 보살핌인가, 어째서 아기를 위한다는 관심인가 고민하고 또 고민해봤다.


아니었다. 아기의 안위는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지나가는 청년에게 (갑자기?) 복종과 순종을 기대하는 권위주의와 이기심이었다. 지난 시절 아기를 업어 키우거나 기저귀 한번 제대로 갈아준 적 없을 게 뻔한 할아버지도 담배를 물다 말고 말을 얹었다. 주워 들은 온갖 근거 없는 지식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24시간 곁을 지키고 코 밑 솜털마저 관찰하는 우리에게, 아이를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잘 좀 키우라며 혀를 찼다. 어째서 이런 무례가 가능한가. 한 단어 한 단어는 탁한 가래침이었다.


네 부모님 뻘이어서 하는 말이야. 우리가 다 낳고 키워봤다. 내가 정답을 알지. 어른이 말씀하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다니. 세상 말세다. 그런 권위와 빈정과 협박에 반응하지 않으면 우리는 되먹지 못하고 아기의 안전에 무감한 이기적인 부모가 됐다. 목숨을 다해 아기를 낳았지만 나는 영원히 그들에게 자식 뻘이었고 끊임없이 부모로서의 인성과 지성을 의심받고 있었다. 심지어 행복할 자격을 잃었다. 언제나 어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화가 나고 가끔은 그 앞에서 울컥한다. 집에 돌아와 아기띠를 풀면서 땀에 젖은 아기의 등을 쓸어내리며 윗세대의 시선에 분노한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고 소리를 질러보기도 한다. 그렇게 일상의 좌절을 겪으며 우리 부부는 분노로 흔들린다.


이 과정에서 명확하게 빛나는 사실이 있다. 우리가 키우는 이 아이는 내 뒤에 왔지만 나를 앞질러 갈 어엿한 인격이라는 것. 더 많은 과학적 근거를 갖추고 더 깊은 지식의 자양분을 딛고서 나보다 나은 어른, 더 나은 부모가 될 것이라는 것. 우리는 우리가 겪어 온 그런 어른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자녀를 믿고 다음 세대의 정보력과 신중함을 격려해주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더이상 기죽지 않기로 했다. 뻗대기로 했다. 그들의 비과학과 비논리에 고분고분 따르기 시작하면 그 관성에 물들고 그 관성은 내 아이에게 이어져 언젠가 비슷한 어른이 되고 말 테니까. 더 나은 인생을 주기 위해 귀찮고 번거롭고 껄끄러울지언정, 목숨을 다해 철없고 이기적인 '다 큰 자식' 이 되기로 했다.


어르신들, 간곡히 말합니다. 저리 가세요. 여기 젊은 부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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