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된 가난은 기회다
지원 받는 아동수당과 양육수당을 합치면 한 달 30만 원이다. 이것으로 기저귀와 분유 등 육아 관련 비용을 충당한다. 2년 전 퇴사한 나는 이직 준비 중 아이가 생겨 지금까지 무직이고, 남편은 육아에 합류하느라 출산을 기점으로 퇴사했다. 남편의 회사는 육아휴직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아기를 맞을 준비를 하려니 물리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또는 어떤 방식이 우리 가정에 적합할지, 되어 봐야 알 일이었다. 확실한 일이란 마음가짐 뿐이었다. 서로를 구체적으로 격려하고 의지할 여건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게 공동육아였다. 두 사람이 매 시간 함께 궁리하고 대응하는 '한 팀'이라는 확신만 있으면, 미지의 육아도 괜찮았다. 그래서 초보 부모에게 가장 난이도가 높은 생후 3개월을 공동육아하기로 결정했다.
예산은 타이트했다. 남편이나 나나 직전 직장의 근속연수가 2년 미만이라 퇴직금이 얼마 되지 않았다. 지출을 체크해봤다. 살림을 챙기는 것 외 딱히 들 일이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됐다. 공과금과 식자재, 육아용품이 지출의 90퍼센트였다. 적금이나 재테크, 무리한 보험을 드는 등의 여윳돈은 없었다. 그렇다고 팍팍하지만은 않았다. 집에 온 친구를 대접할 상을 차린다던가 배달음식을 시키는 데 추가 비용을 들였고 한 달에 두어 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바람을 쏘였다. 팬케익이나 간식류는 유튜브를 보며 집에서 만들었고 보름에 한 번은 화병에 꽃을 꽂았다.
서울시 지원, 신혼부부 대출을 받아 1프로대 저렴한 이자로 전세집에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서울시 고맙습니다. 덕분에 공동육아합니다). 연식이 오랜 낮은 빌라로 왔더니 관리비가 따로 없었다. 주거를 유지하는 고정 출혈은 월 20만 원에 못 미쳤다. 건강이 의심될 때마다 소아과, 내과, 피부과, 비뇨기과 등을 돌아가며 내원했지만 진료비는 매번 천 원도 안 나왔다. 돌 되기 전 아기는 그만큼 진료비 지원을 받게 된다.
육아비용과 식비, 교통비와 통신비와 대출 이자, 종종 발생하는 부의금 축의금 등 모든 지출을 통틀어서 한 달 평균 백이십 만원 정도 썼다. 우리 셋이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사는데 드는 총액이었다. 자가용이 없고 식료품 외에는 쇼핑을 안 하고 집세를 아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한번, 서울시 고맙습니다!)
외식이 어려운 대신 친구들을 초대했다. 익숙해진 친구들이 나중에는 초대하지 않아도 불쑥불쑥 나타났다. 늘 차려먹는 밥상에 수저를 더해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근사한 디저트를 사오곤 했는데 때때로 꽃을 안고 오면 그렇게 기뻤다. 친구들은 아기의 자라는 모습에 신기해하며 볼 때마다 애정을 키워갔다. 그들이나 우리나 밖에서 모여 먹고 마실 때보다 소비가 줄었다. 커피와 차, 과자와 잼과 버터는 항상 구비해두었다. 기분을 낼 때는 편의점 맥주가 있었다. 외식하지 않는 게 딱히 아쉽지 않았다. 바람 쏘일 겸 종종 카페에 가는 호사로 충분했다. 지방에 사는 부모님이 올라오시면 왕복 기차 티켓을 끊어드릴 만큼 그럭저럭 살 만했다.
처음 계획한 공동육아 3개월에서 더 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줄곧 함께해온 육아를 혼자 할 엄두가 안 나기도 했다. 결혼과 퇴사는 예정됐었지만 출산, 심지어 함께하는 육아는 계획에 없던 터라 돈이 필요했다. 낮에는 육아, 밤에는 재택으로 파트타임 일을 하면서 얼마간 내가 돈을 벌었다. 공동육아로 신체적 정신적 부담이 반으로 줄었기 때문에 출산 후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백일 안에 모든 면에서 컨디션이 돌아와 몸이 가벼웠다.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개어 일하는 동안에는 남편이 아기에게 더 신경썼다. 그렇게 5백만 원 조금 넘게 번 돈이 최근 10 개월 동안의 가정 수입 전부다. 플러스, 정부 지원 육아수당이 매달 30만원씩 있었고. 땡큐코리아.
아르바이트 덕분에 공동육아 기간은 7개월까지 늘어났고, 8개월 차부터는 남편이 취업 준비에 들어갔다. 그 즈음엔 나 혼자도 육아가 할 만해졌다. 남편은 육아 시간의 총량만 줄었다 뿐이지 필요한 순간마다 민첩하게 움직여 아이를 돌보고 가사를 채웠다. 반년 넘게 훈련된 프로 아빠였다. 공동육아를 기점으로 우리는 전보다 훨씬 서로를 인정하는 애틋한 사이가 됐다. 육아와 가사의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면서 한 팀으로 지내는 일상은 단언컨데 환상적이다. 아기라는 과제만큼 무섭고도 짜릿한 공통과제는 없다.
가끔, 누가 물어보면 이런 가정들을 해 본다. 일찍이 공동육아를 계획하고 몇 개월이라도 돈을 더 모아놨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둘 다 중소기업에서 일했고 육아휴직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대기업에 다니면서 육아 휴직을 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완벽한 조건일까. 몇 개월이라도 얼마간 수입이 끊이지 않고 돌아갈 곳이 보장되어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지. 이런 상상마저 자발적으로 해 본 적은 없었다. 우리의 생활이 아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아하느라 다른 인생들과 비교할 틈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끼리 줄곧 유익하고 흥미로운 시절을 보냈다.
주변에 연봉 사천 오천을 웃도는 친구들이 돈 때문에 공동육아를 못 하겠다는 푸념으로 부러워할 때면, 그들의 조건을 대입해본다. '음, 저 상황이라면 맘 참 편했겠다.' 속으로 생각한다. 단순히 3개월, 6개월, 1년의 생활비가 아닌 커리어 중단에 대한 고민이라는 것도 이해한다. 그 시간을 아껴서 얼마나 멀리 승진하고 얼마나 배로 돈을 벌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므로 쉽게 얘기할 수 없다. 다만, 나와 남편도 같은 입장이었다. 결혼 전, 아이가 있기 전, 회사에 다니는 내내 언제나 하던 고민이었다. 내후년까지 계속가게 될지 이직을 할지, 앞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이 업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지, 10년 뒤에도 내 가치는 유효할지,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일을 그만두려나 등등. 그렇게 육아 전에도 육아 중에도 육아 후에도 같은 고민을 한다. 공동육아라는 변수로 없던 고민이 새삼 생긴 건 아니었다. 이직하려다 일정이 꼬여서 3개월 6개월 쉴 수도 있을 것이고, 의도적으로 일을 중단해야 할 때도 있을 테고. 배우자가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본인은 연봉 9천에 돈돈 하는 팀장과 일한 적이 있었다. 그녀도 딴에는 급하고 절박했을 거다. 먹고사는 문제는 참 많은 사람들에게 액수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상상과 기준에 달렸다.
30대 중반에 둘 다 퇴사하고 공동육아를 해 온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이 정도다. 돈, 필요하다. 하지만 아주 많이는 아니다. 두 사람이 있으면 아기 용품마저 덜 필요하다. 대부분의 장비는 홀로 아기를 돌보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니까. 아기가 말을 트고 두 발로 걷기 전에, 혼자서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 해 우리의 손길이 매일의 생존과 직결되는 주 7일 24시간 그 곁을 지키는 경험은 중대하고 특별하다. 이 시기가 얼마나 피곤하고 동시에 얼마나 눈이 부신지는 매일 하루 열시간 이상 지켜본 사람만이 안다. 공동육아에 관심이 생겼다면 관념적 우려를 하기 전에 필요한 비용과 여건을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길. 그리고 상황이 허락된다면 평생의 한 번인 이 소중한 기회를 꼭 붙들 수 있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