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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스텔라 May 14. 2020

재난지원금에 입꼬리가 묘하다

‘죽겠다’는 말의 무게가 이렇게 다르다

K는 손짓으로 이층 레스토랑을 가르켰다. 외국어로 쓰인 간판이었다.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백수 둘이서 모처럼 기운을 내자며 이태원에서 만난 날이었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메뉴판을 가져다 놓고는 맑은 유리컵에 물을 따랐다. 구색대로 음식값은 비쌌다. 식사를 마치자 K는 이만 원씩 내면 되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일주일치 식비가 나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교통비가 모자라 40분 거리는 걸어다니고 5천 원짜리 돈까스를 위해 2주 아니 한 달을 벼르던 시절이었다. 나는 나에게 한 실수를 깨닫고 자괴감에 빠졌다.


인턴을 수료한 회사에서 정규직 제안을 거절하고 고시원 생활과 최저시급의 알바로 버텼던 이유는 돈에 굴복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돈이 없어서 돈만 많이 주는 회사를 목표 삼지는 않겠다는 묘한 기준이 있었다. 적성을 살필 겨를 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에 대한 억울함이었다. 이후 목표는 여러번 바뀌었지만, 시간을 갖는 것 자체가 좋았다. 생각할 시간의 사치. 그것이 그때의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그럴 듯한 위로요 보상이었다. 내 열악한 생활을 측은해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신세 한탄을 하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처지에 어울리는 대응을 하려 했던 것 같다. 유보 기간을 내심 즐겼다.


그러나 식사에 만족스러워하는 K를 볼 땐 달랐다. 정말이지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순진하지 말았어야 했어. 팔짱을 끼며 힘내자고 말하던 그를 의심없이 따라간 건 분명 어리석은 실수였다. 둘 다 백수였지만, 우리는 한번도 같은 처지인 적이 없었다. 무급 인턴을 하면서 생계에 지장이 없고 아빠 카드를 쓰는 백수는 나와 사정이 달랐다.


편의점 알바에게 부탁해 유통기한이 지난 김밥을 얻고, 마트에서 재고 비우기로 묶음 처리한 과자를 사 모으면서 나는 '상황이 좀 그렇다'고 말하면 말했지 ‘돈이 없어서’라고 쉽게 말하지 못했다. 돈이 없다는 말은 너무 무거웠다. 가난에 대하여. K는 언젠가 가난에 대한 긴긴 감상에 젖기도 했다. 그에게는 백수가 낭만이었다가 놀이었다가 야릇한 감성이곤 했다.



9년 전 그때 그 일이 생각난 건 재난지원금으로 여론이 시끌벅적해질 무렵이었다. 다들 어렵다고 했다. 왜 저소득층만 지원하느냐며 누구는 안 힘드냐고 했다. 마치 돈이 남아돌아서 공평하게 나눠주는 축제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힘들다는 말이 풍선껌처럼 권태롭게 부풀려졌다. 3월 초에는 생계를 잃고 벌이가 막막해진 서민의 실황이 기사로 떴다. 코로나19의 타격으로 월 20만 원도 안 되는 수익으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외벌이가 "들어놓은 보험 담보로 대출을 300만 원 받았다. 한 달, 두 달은 메울 수 있는데 이제 대출할 데도 없고"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이전 평균 수입이 월 200만 원 남짓인 외벌이 가정에 재난을 대비할 여윳돈은 없었다. 댓글은 뜨거웠다. 벌이 없이 놀고먹는 사람에게 정부가 돈을 퍼준다고 불만했다.


지원 받지 않아도 되는 인생이 훨씬 안전하고 윤택한 바를 저들이 모르지 않을 거다. 지원금을 아슬아슬하게 탄 사람, 아슬아슬하게 놓친 사람도 있다. 이 구간에 빠진 사람들 또한 최소한 극빈층은 아님을 반증했다. 이들의 억울함이 존재한다고 해서 절박한 사람에게 가는 지원금이 운빨 낭비 자금으로 폄하될 순 없었다. 여윳돈으로 목돈을 예치해두었거나 현재 소득이 줄지 않은 사람마저 너도나도 죽겠다며 옹알이하는 아기처럼 따라했다. ‘죽겠다’는 말의 무게는 너무나 달랐다. 그런 장난 축에도 못 끼는 감수성이 정말 죽을 것 같은 사람을 죽이려든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인터뷰를 들었다. 고소득자를 소외시켰다가는 그 사람들이 '화를 내서' 전국민 지원을 해야한다고 했다. 아무리 곱씹어도 나는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었다. 장애인용 엘르베이터를 장애인용이라고 해서 비장애인들이 불공평하다고 화 낸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들렸다.


대기업에서 프로그래머, 기획자, 디자이너, 마케터 등 그럴 듯한 타이틀이 존재하는 건 가장 밑바닥에서 상품을 만들어내고 재료를 가공한 단순 노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상품이 존재하지 않으면 앞서 말한 타이틀은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 직장에서 본인이 안정적으로 받는 월급, 그 돈의 출처를 끝까지 추적하면 결국 (최저임금으로 헌신한) 말단의 노동력, 서민이 나오게 된다. 하청에 하청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 헐값으로 대신 노동하고, 소비자들이 상품 값을 몇 배로 치른 덕에 본인은 기업에서 안정적인 연봉을 받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청에 하청의 일 역시 이용자, 즉 36개월 할부로라도 상품을 구매한(지불한) 서민이 있었기에 가능해진 벌이다. 


일용직이 있기에 아파트가 세워지고, 최전선에서 광기 어린 고객을 상대하는 서비스직 말단 노동자를 거침으로써 소비자와 기업은 소통한다. 일상적 소비에서 우리는 예외 없이 누군가의 노동을 업는다. 인건비조차 안 나오는 저렴한 서비스를 골라골라 이용한 덕에 생활비를 아꼈고 여윳돈을 쌓아올 수 있었다. 누군가 헐값으로 노동을 해준 덕이다.


그렇게 싼 노동을 딛고 경비를 아끼고 자신의 가정을 먹여살리고 여유를 부려 저축까지 해왔음에도, 말단의 생사를 외면한 태도는 배신에 가깝다. 누구는 안 힘드냐니. 내가 딛고 선 사람들에게 ‘돈이 없다’는 말은 가벼운 푸념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무게다.





정부와 시에서 재난지원금이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편과 나는 자격요건을 들여다봤다. 우리 가정은 건강보험료를 다 합친 금액이 5만 원이 못 되어 수급에 안정권이었다. 공돈에 내심 기쁘면서도 이걸 좋아해도 되는지 조심스러워 내색하지 못했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지원금에 대한 구체적인 말이 나온 게 3월이었던가. 남편과 나는 우리가 코로나19의 직접적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현금으로 나올 줄 알고 이걸 어디에 어떻게 기부해야 할지 고민이 시작됐다. 예기치 못한 파산과 실업 등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대대적인 지원이 있기 전, 4월 중순 경에 이미 쿠폰 형태의 지원금이 나왔다. 영유아 자녀가 있어 지원 대상이라고 했다. 농수산 쪽 열악한 사업장의 식료품을 샀다. 그동안 안 먹던 식품류를 먹어 좋았다.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 택배를 보내면서 은근 생색도 냈다. 그동안 우리 가정에 제한적이었던 야식과 간식을 풍족하게 먹었고 또 나눌 수 있어 신이 났다.


이달에는 전국민에게 주어지는 지원금, 서울시 내 80만 원을 가용할 수 있는 재난지원금이 나올 예정이다. 한 달 반 전부터 남편과 합의해 전액 기부를 계획했음에도 막상 때가 되니 묘했다. 기부신청란을 빈칸으로 남겨두고 싶은 욕구가 불어났다. 지금처럼 소상공인을 응원하고 그렇게 취지에 맞게 쓰면 모두가 유익한 거 아닌가. 어떻게든 번복하고 싶어 속에서는 온갖 거창한 말을 만들고 발을 구르는데, 남편은 눈동자가 온화하다. 대놓고 말하기엔 부끄럽고 그런데 주머니에 두고 싶고. 기부는 그냥 반만 하자고 해볼까. 마음이 참 얄궂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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