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만 원을 떼어냈다. 재난지원금 카드로 식료품을 구입하고, 덕분에 아낀 생활비를 후원에 쓰기로 했다. 전액 기부를 계획했으나 막판에 액수가 줄었다. 변수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내 소심한 욕심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변심을 눈치챈 남편이 얼마가 적당하겠느냐고 물었다. "40만 원." 남편은 반문 없이 수긍해 주었다.
반으로 동강낸 액수가 민망해서라도 빨리 보내버리고 싶었다. 문제는 후원처였다. 각종 후원단체의 홍보 영상은 심장을 쑤시는 사연으로 넘쳐났다. 우리는 한마음으로 유아에 마음이 쏠렸다. 처한 상황을 인지하지도 못할 꼬물이들이 아른거렸다. 홍보물을 통해 노출된 사연들은 도움을 얻을 게 확실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상 하단에는 해당 아이에게 후원금이 즉시 전해지느냐는 댓글 문의가 여럿이었다.
따로 아껴둔 돈도 아니고 재난지원금으로 생긴 공돈이면서 괜히 엄중한 선택을 하는 기분이었다. 급한 생계비를 억지로 베어내기라도 한 듯, 잘 쓰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효율적으로 쓰일 것인가 혹은 꼭 필요한 사람에게 투명하게 전달될 것인가 등 후원금 운용에 대한 의심이 잔가지를 쳤다. '직접 전해주고 싶은데.' 하지만 우리가 직접 닿을 길은 없었다.
출생 신고도 안 돼 예방접종조차 못 하는 아기들, 쿰쿰한 냄새가 밴 고시원 복도에서 벽을 잡고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들이 있다고 했다. 분명 근처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아기를 홀로 둘 수 없어 어쩔 도리 없이 생업을 멈추고 단칸방에서 가난의 공포를 헤매는 한부모의 삶이 존재한다. 전국 곳곳에, 서울 어딘가에 있다는데. 나는 이들 중 누구도 모른다. 당연히 모른다. 왜 당연하지. 머리가 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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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가정이 있다 보니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네." 라는 말로 세상과 담을 쌓는 사람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혼자 사니까, 평소에 밥을 잘 안 챙겨먹어서, 지금은 무직이므로 등을 이유로 지인들을 초대하고 낭만을 채웠다. 격차가 크지 않은 인생들끼리 모여 힘듦을 털어놓고 서로 위로했다. 그들 중 주택이나 예금 따위의 재산이(혹은 월 수익이) 우리보다 적은 사람은 드물었다. 고만고만한 배경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그들만 챙겼다. 그 정도가 겨우 나의 이웃이었다. 세상과의 담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했다.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맘 놓고 일을 다녀오도록 아기를 봐 주고 싶은데 그들을 모르니 제안을 할 수가 없다. 왜 안 보일까.
교회든 책 모임이든 계급이 골고루 섞인 커뮤니티를 찾기 어렵다. 벽이 있었다. 내가 다닌 교회만 하더라도 인근 대학 학생들과 중산층 동네의 안정권 가정이 대다수 교인을 차지했다. 어느 독서모임은 한번에 2-30만원의 참가비를 낸다고 했다. 취미생활에 그 정도 돈을 한번에 낼 만큼 여유를 가진 사람이 구분됐다. 어중이떠중이의 진입을 막는 구조가 설계되고 구현되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아무나 들어오고 아무나 낄 수 없는 자리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대부분 낭만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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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 안 되는 후원금을 쪼개기로 했다. 환경단체와 아동 후원 단체 둘로 나눴다. 보이지 않는 대상에 연민이나 사랑을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돈을 분산시켜버리니 마음이 편했다. 방세를 못 낸 친구에게 송금하거나 지인이 속한 단체를 후원할 때는 돈의 쓰임이 궁금한 적이 없었다. 그 얼굴을 떠올리면 마냥 다행스러웠다. 그들이 조금이나마 안도하고 편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보낸 돈을 설령 엄한 데 쓴다 해도 상관 없었다.
출생신고도 못한 아기와 그의 부모에게 작은 온기나마 나누고 싶은 지금은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단체를 거치지 않으면 그들이 보이지 않고, 단체의 문조차 두드리지 못한 이들은 어느 곳에서도 인지되지 않는 유령 존재다.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눌 기회가 있었다면 이렇게 공돈에 생색내고 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헤매다 내 아이의 눈을 보며 가만가만 사랑한다고 말했다. 떠오르지 않는 얼굴들이 떠올라서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