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에서 속이는 건 일도 아니다. 얼굴과 혀가 굳기 전까지는 그랬다.
회사는 기껏 30분 1시간 안에 나를 판단한다. 그 사이에 드러난 단점은 고스란히 탈락 사유가 되므로 면접 내내 매력적이고 유능한 사람이어야만 한다. 면접관을 속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머릿속에 컨셉을 정해놓고 목소리와 표정, 가치관과 성향을 미리 세팅해두는 것이 편하다. 수정을 거친 내가 낯선 모습일 수는 있다만 그까짓 30 분을 지속 못 할 이유는 없다. 구직을 앞두고 그 쯤이야.
3년 전 이직 준비를 할 때였다. 점심시간과 반차를 이용해 면접을 다녔다. 낯선 회사를 방문해서 점잖게 손을 포갠 다음 낮은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예민한 질문에는 적당히 뜸을 들였다. 정말 차분한 스타일이시네요. 경계를 푼 면접관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결과는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당시 재직 중인 회사에서 종종 내게 하는 말이 있었는데, "넌 어디서 약을 하는 게 분명해" 따위의 빈정이었다. 까부는 몸짓과 짓궂은 장난에 혀를 내두르던 상사가 그렇게 비꼬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낯선 회사는 곧장 입사를 제안했고 기대 이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그들의 결정에는 나의 '차분함'이 한몫했을 것이었다. 끝내는 그게 부담스러워 제안을 거절했는데 어쨌거나 속이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이다.
하필 코로나시절이 겹치면서 공백기가 늘어졌다. 구직 활동은 거듭 '다음 달'로 미뤄졌다. 평화롭고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이 몇 달 흘러갔다. 남편과 아기와 나. 우리끼리 너무 평화로워서 집에서 단내가 났다. 잠잠하게 고인 평화가 명치까지 차오르는 동안 구직이라는 숙제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늘어져 있게 될까. 가끔 현기증이 났다. 평화의 단내를 깨기 위해 2년 만에 이력서를 오픈하고 제안을 받아보기로 했다. 능동적으로 나서서 회사를 찾아보는 활동은 아직 엄두가 안 났다.
일을 시작하면 아기를 저녁까지 봐 줄 곳을 찾아야 했다. 어느 날 채용 공고의 상세 페이지를 펼쳤다가 다리에 매달리는 아기를 보고 체기가 돌아서 관뒀다. 하루 확진자가 100명을 웃도는 상황은 여전하고 코로나는 아기의 팔을 걸고 같이 자랐다. 아기에게 미안했다. 내 이력을 보고 연락주는 회사가 있다면, 그땐 정말 때가 왔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야지. 딴에는 그걸 구직 시점의 기준이라고 잡았다. 남편도 계속 일자리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이왕이면 나보다 그가 먼저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었다.
경력 단절이란 그런 것이겠지, 조바심이 생길 즈음 홍보에이전시로부터 연락이 왔다. 반가웠다. 일에 확신이 서진 않았지만 좀 안 맞으면 어때, 연봉만 맞춰 준다면야 못 해 볼 것도 없지. 패기가 생겼다. 무직 기간이 너무나 길어졌기에 연봉이 싹둑 깎여도 감지덕지인 처지였다. 종로로 가는 열차 안에서 30분 내내 불안감이 부글거렸다. 인사팀의 안내에 따라 들어선 회의실에는 팀장급 셋이 자리했고 내가 준비한 자기소개 PT 후에 질문이 시작됐다.
이력과는 다른 식의 업무라 잘 할 수 있을까 솔직히 걱정은 되어서요. 당연한 의문이었다. 나는 당연한 답으로 응수했다. 안 해 본 일이지만 공포나 우려는 딱히 없습니다. 해봄직하다 판단해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거고요. 뻔한 답이 미덥잖았는지 비슷한 질문이 두어 번 더 이어졌고 곧 개인 성향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평소 어디에 관심이 있으세요? 에이전시는 워낙 미션이 다양해서요. 하고 싶은 분야나 기피하는 부분들이 있다면? 어려울 것 없는 질문이었는데, 묘하게 난처했다.
기피 분야라면... 대표적으로 자동차, 화장품과 패션, IT 관련입니다. 굿즈 리미티드에디션 등의 캐릭터 상품도 불편해하는 편입니다. 사 모으고 쉽게 교체하는 패턴의 소비가 땅과 공기를 망치니까요. 온라인쇼핑과 배달서비스 역시 더 많은 포장지와 쓰레기가 달려와서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빠름을 강조하는 웬만한 서비스를 싫어합니다. 탁한 공기에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 시점까지 생산량을 줄이지 않으면서 기술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고 말하는 상업주의가 지겹습니다. SNS의 기만에도 숨이 막힙니다. 일상에 만족할 수 없도록 자극하고 주무르는 광고가 인간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좋아요나 공유하기로 반응을 얻지 못하면 마치 가치가 덜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한 것처럼 낙담하게 만드는 세계관이 싫습니다. 즉각적인 반응이 없어 즉각적으로 실망하고, 즉각적으로 삭제하고 즉각적으로 언팔하고. 실제 인간 관계는 헐거워졌잖아요.
이게 당최 일을 하겠다는 말인가. 돈 되는 일은 다 싫다는 답이었다. 말도 안 되게, 이 모든 문장이 한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무엇이 얼마나 싫고 무슨 이유로 기피하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남편과 매일 밤 나누는 주제니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다 싫어요, 싫어해요! 그리 말하고도 채용이 된다면 좋을 것이었다(말이나 돼?). 실제로는 열을 맞춰 손 흔드는 문장들을 모른 척했다. 이곳은 마음을 공유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면접관을 속이는 건 어렵지도 않고.
어디든 열려있습니다. 안 해본 분야라면 다이나믹하겠다는 막연한 기대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안 좋아하거나 관심이 없던 산업군의 일을 한 적이 있지만, 업무를 완수하는 것 자체에 쾌감을 느끼는 편이었습니다.
심장이 낮게 요동쳤다. 힘들었다. 이런 질문에는 자연스러운 대처가 힘들다기보다, 이런 거짓 대응에는 자연스러워지고 싶지 않았다. 건물을 나서는 길이 영 개운치 않았다. 나는 끝내 딱히 선호하는 방향도 취향도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기피 분야를 구체적으로 궁금해하기에 자동차 정도라고 얼버무렸을 뿐이다.
이번 면접은 단순한 이미지 변경과는 차원이 달랐다. 성격이야, 사람이 늘 까불 수만은 없지 않나. 내게는 때에 따라 차분한 모습이 있고 필요시 언제든 그 얼굴을 꺼낼 수도 있다. 가치관과 견해는 도무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못 견디게 싫어하는 것들을 기꺼이 즐길 수 있다고 했다. 그 얼굴로, 그 마모된 마음으로,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 아이에게 덜 부끄러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은 코로나로 갇혀 지내는 평화 속에서 불어나고 불어났다. 욕망은 돈벌이와 자꾸만 반대로 갔다. 네 세상을 오염시키는 일에서 멀어지리라 간절히 희망할수록, 손 닿는 모든 일이 오염과 파괴라는 사실에 자괴했다. 대안을 주지 못해 괴로웠다. 그런 현실이 두려우면 최선을 다했어야 했는데, 두려워만 했다. 천생리대를 쓰고 집안의 물티슈를 없애고 도시락김 대신 전장김을 잘라 먹는 즈음의 사소한 형태는 최선이 아니었다.
인생의 가장 긴 시간을 보낼 직장이야말로 관건이었다. 궁극적으로 이웃과 세상에 미칠 영향이 관건이었다. 내 이력과 유관하면서 우리 식구 밥벌이가 될 만한 일 중에 그런 일이 있나(있다면 어디에 있나). 있어도 내가 그 자리에 앉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동안 가치 중심적인 일에 지원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십 년 전부터 매번 서류에서부터 낙방이었다.
나는 나를 원하는 곳이 필요하고, 돈을 주는 자리가 필요한데 이도 저도 아니게 취업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면접관을 속이는 게 일도 아니었던 얼굴과 혀가 둔해졌다. 둔해지고 싶어졌다. 구직은 참으로 미치게 어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