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답했다
남편은 말이 많아졌다. 예비부부나 가족 계획 중인 사람을 만나면 봇물이 터졌다. 그 모습은 신나보이기도 하고 애원하는 듯이 느껴지기도 했다.
달라요. 실제 육아는 너무나 달라요. 영화와 드라마는 죄다 거짓이라고 느꼈어요. 연출가 중에 제대로 육아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구나, 생각할 정도니까요. 퇴근 후 저녁에만 아기를 보거나 주말에 몰아서 놀아주기, 이런 부분적인 육아와 24시간 매일의 육아는 차원이 달라요.
처음에는 저도 두려웠죠. 3킬로그램 밖에 안 되는 살덩이가 흐물거리니까... 그렇게 작은 사람을 안아본 적이 없어서 손 밖으로 흘러내리거나 부러지기라도 할까봐 무서웠어요. 내 눈 앞에서 까딱하면 생사를 모른다는 게 무섭잖아요.
아기가 얼마나 무능하냐면요. 자기 손발을 컨트롤 못 해서 스스로 할퀴고 상처를 내요. 누워만 있는데도 홀로 두기 위험해서 속싸개로 꽁꽁 묶어둬요. 그래야 허우적거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잘 수 있거든요. 안 잘 때는 답답할까봐 싸개를 풀어놨는데 얼굴을 막 긁어서 피를 봤어요. 그대로 두면 눈이라도 다치겠다 싶어서 전전긍긍하다 한 의사의 조언을 들었는데 귓속에 연고를 발라주라는 거예요. 눈 주위를 긁는데 귓속이라니 긴가민가했어요. 알고보니까 일리 있는 말이더라고요. 어딘가가 불편하긴 불편한데 도대체 어느 부위가 문제인지 모르니까 아기는 머리 전반, 얼굴 주변부를 피 나도록 긁는 거죠. 귀가 가려워도 귀가 어딘 줄 모르는 게 너무 어이없지 않아요? 시력 없는 눈은 껌벅껌벅, 갑자기 벌겋게 울면서 몸부림치다가 젖을 문 채 지쳐 잠이 들고. 단 하루라도 매시간 손길과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예요.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까 거짓말처럼 활짝 열린 웃음을 짓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전에도 경련처럼 피식피식 입꼬리가 올라가긴 했지만 얼굴이 꽃처럼 피는 건 처음이었어요. 생후 46일 되던 날에는 자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가 빨았는데, 드디어 신체의 일부를 활용해서 스스로 욕구를 채운 날이었어요. 뭔가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대견해했어요. 50일 즈음부턴 한숨을 쉬어요. 뭘 알고 배워서가 아니라 한숨이란 게 원래 저렇게 터져나오는 거구나, 한숨 쉰다고 뭐라고 나무랄 게 아니구나 싶은 거 있죠. 5키로 남짓한 몸뚱이가 한숨에 짦은 탄식까지 “아!“ 하는 게 어찌나 우습던지.
두 달이 지나고 어느 이른 새벽에는 느닷없이 웃음이 터졌어요. 숲에서 갓 건진 사람처럼 가장 원초적으로,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이 없는 잇몸을 빨갛게 드러낸 채 못 견디겠다는 듯이 막 웃는데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벅차요, 그 순백의 아름다움에. 그런 웃음은 어떤 기준으로도 감히 평가할 수 없을 거예요. 인간이 저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질 않았어요. 나는 어땠을까. 나도 본연의 모습이 있었을 텐데. 내 얼굴과 표정을 돌아봤어요. 우린 자라면서 계속 깎여지고 다듬어졌겠죠. 저는 그렇게 웃을 수 없어요. 절대.
붕어처럼 입을 뻐끔뻐금하거나 쩝쩝 소리를 내거나 침을 삼키는 건 아기가 배고프다는 신호예요. 그런데 어느날은 돌고래 같은 소리를 들었어요. 생존을 위해 터지는 울음이나 짧은 탄식 이외의 소리. 그것도 긴 호흡의 소리는 처음이었는데 꼭 뭐라 말을 하는 것만 같았어요.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서 물었어요. 기분이 좋아? 정말이지 너무 신기한 거 있죠. 쩝쩝 응애 말고 다른 소리가 난다니. 며칠 뒤엔 자기 주먹을 위로 뻗쳐서, 제 몸이 그렇게 멀리 나가는 게 신기하다고 그걸 한참을 올려다보고 있고.
지금 말한 전 과정이 기껏해야 생후 70일에서 80일 사이에요. 70일 만에 키는 8센티미터가 자라고 몸무게는 두 배로 늘어서 6키로그램이 됐어요. 청소년기에 엄청 자라봤자 1년에 10센티미터 넘는 정도잖아요? 생각해 보면 이렇게 폭발적인 속도로 매일매일 뼈와 살이 늘어나는데 누구든 안 울고 배길 수가 없을 거예요.
아기를 관찰하는 일이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지, 남편은 애타는 눈망울로 말을 이어나갔다.
달라진 목소리를 듣는 것도 매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놀라운데 어느새 주먹을 접었다 펴고 몸을 옆으로 뉘고 심지어 뒤집기까지 하고... 무기력한 살덩어리에 기능이 추가되는 게 마법 같아요. 엄청난 속도로, 엄청난 변화가 매일 벌어지니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우린 매일 소리를 질렀어요. 이리 와, 와서 이것 좀 봐! 그렇게 돼요.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게, 혹시 내가 놓친 것은 없을까 걱정될 만큼 급격하고 신기하고. 그래서 문득 서글퍼질 때가 있고. 이런 날들이 곧 그립겠지 하고.
이 시기에 자라는 아기를 보지 않으면요. 생에 다시 없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놓치는 거예요. 같이 지켜보고 놀라워하면서 부부가 공유하는 즐거움도 커요. 주말이면 전시 보러 가고 맛집에 술집에, 우리 커플이 돌아다니기를 얼마나 좋아했어요. 둘이 데이트하는 것도 모자라 친구들을 매일같이 불러서 늦게까지 와인 마시고 음악 틀고 놀았어요. 그런데 그런 게 아쉽지가 않아요. 쉴 틈 없이 새로운 장면이 기적처럼 일어나니까 지루하지 않아요. 15평 집 안에만 있는데도요. 누가 아기 봐 줄 테니 영화 보고 오라고 해도, 그런 건 나중에 하면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매주 영화관에 갔는데.
육아의 경험은 복합적이다. 당연하게도 늘 신나고 즐거울 수만은 없다. 남편이 말하는 '기적을 발견하는 기쁨'은 어쩌면 혼자하는 육아가 아니었기에 200퍼센트 부풀려진 감정이었다. 우리도 둘 중 한 사람만 자리를 비우면 두려움과 외로움이 곧장 머리를 치들었다. 육아하는 행위 자체로, 집안에만 갇혀서, 기쁨의 나날이 보장되진 않는다.
피로도가 극에 달할 때 곧장 쉼이 허락되고, 때때로 격앙된 기분을 가라앉혀주는 손길이 가까이에 있는 환경. 믿을 만한 사람(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이 항시 대기하는 환경에서는 육아의 세계가 너그럽다. 복수의 양육자가 동일하게 참여하는 육아만이 긍정의 일상을 완성시킨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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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혼자하는 경우 많잖아요. 분량과 강도가 혼자 해서는 안 될 일이에요. 저도 이렇게 매일 해보지 않았음 몰랐겠죠. 사람이 이걸 혼자서 다 하려면 미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구나 싶었어요. 신체 건장한 남자인 저도 체력이 안 될 정도니까. 소음에 시달리면 우울증이 온다잖아요. 고막을 때리는 절규의 울음을 하루에 몇 시간씩 듣게 되는데 아무도 없이 혼자서, 내가 채워주지 않으면 당장 죽을지 모르는 생명을 끌어안고, 해결할 수 없는 소음을 삼키고 삼킨다면... 어떻게 온전할 수 있겠어요. 이걸 홀로한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해내왔을지. 얼마나 괴롭고 외로웠을까.
아기는 혈당 유지를 해야 돼서 두 시간마다 먹여줘야 해요. 생후 3개월까지는 오래 자봤자 네 시간이죠. 피곤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중간중간 배는 고프지 화장실도 가고 싶은데... 무섭게 우는 아기를 혼자 두자니 걱정되고. 똥 누는 것마저 죄책감이 든다면 인격적으로 살아질 리가 없잖아요. 혼자서, 그렇게 홀로 감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육아는 꼭 같이해야만 해요. 같이 힘들고 그 이상의 기적을 누리고. 함께한다면 확실히 할 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