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1
모두가 스마트하게 살고 싶다며 최신 기기에 열광하지만 나라는 사람에게는 그저 허영심의 산물이라는 생각 뿐 최신 유행이라는 것, 트렌드라는 것들은 내 일상에서 오히려 무료한 것들로 치부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왠지 남들이 다 좋다 그러면 한번쯤 의심해 보기도 하고, 그나마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책도 일부러 찾지 않는 편이다. (어쩌면 그냥 게으른 것 일지도;;;)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시장도 역시나 그랬다. 바르셀로나를 다녀 온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극찬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모든 블로거가, 모든 가이드북이 바르셀로나 최고의 장소로 보케리아 시장을 꼽는다.
그래서 쓸데없는 자존심이 발동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남들과 다른 감성을 갖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을까. 보케리아 시장은 바르셀 여행 중 일주일이나 한참 지나서 가게 되었다. 물론 숙소가 있던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 보케리아에 도달하기 전까지 매번 다른 길로 빠져 영업시간을 못 맞춘 탓도 없지는 않다.
보케리아의 첫 느낌은 이랬다.
'아, 디스플레이가 참 예쁘구나'
그리고 끝 느낌은 이랬다.
'아, 디스플레이가 참 예쁘구나'
딱 거기까지.
보케리아까지 가던 길에 만난-한 낮이었음에도 출근인지 퇴근인지 모를 상태로 야시시 하게 골목에 진을 치고 있던-거리의 언니들 탓에 첫 만남의 설렘 따위는 갖지도 못 했을 뿐 더러, 가장 유명한 시장이라는 명성에 맞게 다른 곳보다 비쌌지만 맛은 없었던 과일 주스는 실망감만 더해주었다. 무엇보다 보케리아가 내 맘에 자리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 마음속 바르셀로나 최고 마켓 자리를 이미 다른 시장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바로 산타 카테리나 시장.
관광지도에도 없던 그(스페인어로 시장은 남성 명사다)와의 만남은 역사적인 날인 3월 1일에 이루어졌다. 사실 보케리아나 산타 카테리나 시장이나 좌식이 아닌 스탠드 형 진열장이 있고, 가게 주인이 유럽 사람이라는 것만 빼고는 우리네 시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시장이다. 다만 색깔별로 쌓아놓은 물건들과 캘리그래피 작가가 쓴 듯한 가격표 때문에 '여기는 외국입니다'를 조금 더 실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우리 선조들이 독립선언서를 외친 그날, 바르셀로나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핼로윈 파티라도 하는 듯 시장 안의 모든 직원들이 코스프레를 하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점원들뿐 아니라 가게 곳곳도 아기자기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고, 시장을 찾은 꼬마 손님들은 대부분 공주풍 원피스를 입고 있어 여기가 진정 시장인 건가- 하는 감탄사를 연발케 했다.
눈 돌아가기 바쁘게 사진을 찍는 동안(핸드폰 소매치기로 인해 이날 찍은 사진은 몽땅 사라졌다) '바르셀로나 시장은 이렇게나 재미있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엄청난 부러움을 갖게 되었다.
며칠 후 시장을 다시 찾아가고 나서야 원래 그런 게 아니라 그 날만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다시 가지 않았다면 바르셀로나 산타 카테리나 시장은 완전 재미 난 곳이라고 사람들에게 지금까지도 뻥을 치고 다녔을 거다.
신나게 구경을 했으니 허기진 속을 채워야 했다.
스페인에서는 타파스를 먹어야 한다지만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지금에서야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기 때문에 타파스를 시키기에는 언어 능력이 한없이 부족했다. 더구나 이곳은 가이드북에서도 못 봤던 순수 재래시장이 아니었던가. 이곳, 저 곳을 기웃거리다 생선가게 앞 초록 외계인 점원들이 반겨주는 인기 맛집으로 향했다.
타파스를 먹는 bar뿐 아니라 테이블까지 손님으로 가득 찼던 그곳은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맛집이 분명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다른 테이블의 메뉴를 빠르게 스캔했다. 뭔가 정체 불명의 면 요리를 사람들이 많이 먹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름을 몰라 주문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훗날 마트에서 3분 조리 식품으로 다시 찾게 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우선 에스트렐라 생맥주를 세 잔 시키고, 열심히 별 모양을 중심으로 인증샷을 찍었다. 그리고는 차례로 나온 음식 시식 -
첫날 도착해서 해변가에서 먹은 빠에야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맛있는 블랙 빠에야와 역시 힐링엔 고기라는 말을 뼈 저리게 느끼게 해 준 스테이크는 고기에 굶주린 여행자들의 입맛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한번 더 먹으려고 했으나 다시 찾았을 때, 줄이 너무 길어 포기한 게 지금까지의 한으로 남을 정도로 말이다.
산타 카테리나 시장의 매력에 푹 빠져 관광 중 종종 이곳을 찾게 됐는데 외계인 아저씨의 식당 말고도 바깥 광장과 이어진 식당에서 먹었던 빠에야와 해산물 모둠도 정말 실하게 잘 나왔다. 가격은 조금 비쌌지만 –
역시나 여행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해야 즐거운 법!
산타 카테리나 시장은 여행 내내 '또 가야지, 또 가야지'를 마음속에 담아두며 나만의 은신처를 만들어 놓은 듯한 작은 기쁨 준 선물 같은 곳이었다.
#시장 더 보기 - 구석구석 보는 재미가 쏠쏠한 안토니 시장
산타카테리나 시장이나 보케리아 시장은 식료품 위주의 시장이다. 재대로 된 재래시장을 보고 싶다면 안토니시장을 추천한다. 우리가 갔을 땐 공사 중이라 임시 건물에 상점들이 입점해 있었는데 의류부터 생활용품까지지극히 평범한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