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써니 Aug 06. 2023

좋아하는 일 찾기 말고,  싫어하는 일 지우기

명륜동 3가 85-7 드림아트빌 301호

예전 사진이 있을까 싶어 블로그를 뒤적거렸더니 대학로 사무실 자리 사진이 나왔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전에도 블로그에 올리는 사진의 해상도를 왜 이렇게 작게 했는지.. 그래서 사진이 너무 깨졌다. 올드한 맛은 좀 있지만.


에필로그 : 나의 20대에 보내는 위로 




졸업을 앞두고 4학년 2학기부터 1년 정도 사물놀이 기획사에서 일 하면서 공연장 운영 경험도 쌓고, 축제 사무국에서 일하며 제대로 월급을 받는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년을 바쁘게 보내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나도 남들처럼 사무직으로 취직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던 무렵 취업은 일단 나 몰라라 하고 배낭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남들 다 가는 유럽 배낭여행을 못 간 한을 풀고 싶기도 했고, 이제 취업을 하면 장기 여행은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압박감에 우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나만의 착각이었고 나는 서른 넘어 세계여행도 다녀오고, 여전히 여행을 엄청 다니고 있다.)


가진 돈도 별로 없었고 겨울시즌이라 갈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이런 부분에 대해 도움 줄 사람이 없었던 나는 호기롭게 '여자 혼자 떠나는 인도여행'을 결심했다. 그 당시의 인도는 류시화 작가의 <지구별여행자>로만 알 수 있는 곳이었는데 책의 처음 에피소드를 보자마자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하고 짜증을 냈던 게 기억에 선명하다. 그렇다. 인도는 '배낭여행의 끝판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곳이었다.


평생을 대문자 ESTJ로 살았던 내게 인도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계획대로 되는 것도 없고, 상식도 통하지 않는 곳이라 어쩔 수 없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게 되는 곳이 바로 인도였다. 그런 곳이었기에 인도를 다녀오면 인생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화장터를 보며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물질적 풍요에 대해 구속받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다. 인도에서의 하루하루는 참으로 스펙터클 했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무료했기에  내 안을 찬찬히 살펴볼 만큼의 마음의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조금 천천히 간다고 큰일 나지 않더라.


그렇게 40여 일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내게 생긴 건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나 자신과 인도에서의 기다림과 맞바꾼 여유로움이었다. 계획을 아무리 세워도 기차는 연착되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일의 나는 그대로 존재하고, 중간에 일정을 아무리 바꿔도 결국 마지막 날 공항으로만 가면 된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가 마음의 여유를 조금은 가져도 된다고, 세상에 급할 건 없다고 나를 일깨워 주었다.


대학교 4학년. 남들은 토익시험 점수를 만들고 인턴생활을 하느라 바쁠 때 나는 비즈공예를 배우러 문화센터에 가고, 여름 방학엔 인턴 대신 부천영화제 자원봉사를 하고, 안정된 직장이 아닌 대학로의 계약직 공연기획사 생활을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들의 속도에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속도는 모르겠지만 남들 시선을 신경 안 쓰고 산다는 건 어렸을 때부터 너무 잘 알고 있긴 했지만)


여행 후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을 때 생각했던 건 '해 보고 싶었던 일을 하자'였다. 그 당시 가끔 영화 소재로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40대 아빠가 꿈을 좇아 밴드를 하거나 회사를 무작정 그만두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나는 뒤늦게 후회하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았기에 젊었을 때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으로 우선 돈을 못 벌어도 내가 관심 갖는 분야에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릴 때부터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많다는 경험을 못 해봐서 그게 좋은지 잘 몰랐었고, 좋은 대학을 다지니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 대기업을 들어간 친구도, 전문직 시험에 붙은 친구도 없어서 크게 불안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도 어느정도 작용했던 것 같다.


대학 교양수업에서 연극을 처음 본 이후인지, 뮤지컬 서포터스를 한 이후인지, 지하철에서 공연기획 아카데미 광고를 본 이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때는 막연하게 공연 쪽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내가 뭘 잘하고, 못하는지를 확실히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론이 참 길었다. 하고 싶었던 얘기는 사실 이게 다 다. 내 능력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 그래서 대학로의 작은 공연기획사에 취업을 했다. 아동극과 성인극을 하고 있고 직접 운영하는 공연장도 소유하고 있어 공연 전반에 걸친 걸 모두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표 두 명, 직원 세 명의 단출했던 기획사 생활을 하는 동안 정말 많은 걸 경험했다. 작은 빌라에서 다 같이 점심밥을 지어먹는 것부터 길거리에서 전단 나눠 주기, 포스터 붙이기, 지인들에게 연락해 자리 채우기, 보도자료 만들기, 예매페이지 만들기, 기자 만나서 공연 홍보하기, 공연장에서 손님 만나기, 프로모션 기획하기 등등 직접 연출과 관련된 부분 외의 모든 걸 경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딸의 성적이나 대학과는 상관없이 남들이 다 아는 대기업에 취업을 하거나 영어선생님이 되길 바랐던 엄마의 반대도 있었지만 이 쪽에서 경험을 쌓아서 나중에 교수도 할 수 있고, 멋진 홍보 담당자도 될 수 있다고 엄마에게 장문의 메일을 쓰고서야 엄마와의 싸움을 끝내고 회사를 편히 다닐 수 있었다.


짧고, 굵게


이 생활을 딱 7개월 했다.

엄마랑 거창하게 싸운 것이 민망할 정도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에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후 내가 알게 된 건 기자에게 주는 보도자료 쓰기는 좋아하지만 만나서 썰을 풀어야 하는 홍보 일은 싫어한다는 것, 빈 벽에 포스터 붙이는 건 좋아하지만 길에서 직접 전단을 주는 건 싫어한다는 것, 공연을 보고 잘 되게 하기 위해 뒤에서 뭔가를 하는 건 좋아하지만 실제 공연에 영향을 주는 스태프로 일하는 건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월급이 70만 원이라도 재미있게 일하면 내가 행복하다는 것과 싫어하는 사람과는 절대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걸 알게 됐을 때 토할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생겨 아무 미련 없이 깔끔하게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6개월 정도를 또 쉬고 스물일곱 살이 되어서야 첫 정규직 직장에 취직을 했다. 그때 연봉은 1500만 원으로 이전 70만 원에 비하면 두 배 높은 금액이었다.


입사하려는 회사는 어린이 전시를 앞두고 관련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아동극 경험이 있었기에

무난하게 서류 통과는 했는데 면접 때 '홍보일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할 수는 있지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고 합격을 했다. 나의 이런 당당함 때문에 뽑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웃는 인상이 좋아서 뽑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찌 됐든 합격은 했으니까!


첫 직장을 얻기 전 이미 난 두 번의 퇴사를 경험했다.

첫 번째는 프로젝트 종료 후 타이밍이 좋아 어렵지 않게 퇴사할 수 있었고, 두 번째는 워낙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하고 급여가 적어 더는 못하겠다고 해서 쉽게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떠나야할 이유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대학로에서의 2년은 재미있게 일하면서 나를 알아가던 시간이었다.

재미있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일을 잘 되게 만드는 것

사회 초년기 때 체득한 이 마인드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로를 떠난 후 백조 시절을 보내던 중에 친한 언니랑 만나했던 얘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재미있는 일을 찾아야지' 했을 때 언니는 '회사를 어떻게 재미로 다니니'라고 했었다. 회사 생활을 꽤 오래 했지만 아직까지는 '회사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회사일이 재미있으려면? 싫어하는 일을 안 하면 된다. 그러려면 내가 어떤 일을 싫어하는지 알아야 그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헤매고 있다면 싫어하는 일 찾기를 먼저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싫어하는 일을 자꾸 하다 보면 '아, 나 그거 좋아했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 테니 말이다.




인도여행 이 후 10년이 지난 2015년에 쓴 글 :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대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