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이대나 누아르는 존재한다.

by 오름

04.


어릴 적 나의 누아르는 아빠였다. 빛이 나야 했지만 가장 어두웠고, 불안했으며 매캐한 냄새로 얼룩졌다. 불행하게도 내 인생이 어둡다는 사실을 열아홉이 넘어서야 알게 됐다. 기억이란 게 존재하는 그 시작점부터 이슬에 헝겊이 슬며시 물들어가듯 언제부터 랄 것 없이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열아홉 십일월 사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부재는 내게 불안을 선물했다. 많이 했던 생각 중 하나가 ‘아빠가 없다면 진짜 좋을 텐데’였는데 막상 아빠의 부재를 경험하니 내 주위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고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래서, 좋아?’


부끄러워 감추고 싶던 내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가림막 없이 모두에게 노출된 느낌이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행여 누가 알기라도 할까 괜히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공허했다. 동시에 불안했다. 삶의 이유나 목적 같은 것들이 공중분해된 것 같았다. 난 이제 뭘 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내 개인 시간이랄 게 없었으며,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단번에 떠오르지 않을 만큼 건조한 인생을 살았기에 고민은 손바닥 위 흩어지는 모래같이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우울함과 어둠이 몸 밖으로 뿜어져 나가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친구가 없는 게 당연했다.


십일월 사일. 그날은 아빠의 생일이었으며, 아빠의 입원일 이기도 했다. 그날 밤 엄마와 동생과 나는 안방에 셋이 누워 함께 잠을 청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며칠간 우린 함께 밤을 보냈다. 나는 눈을 감기가 무서웠다. 행여 아빠가 병원에서 나와 늦은 저녁 현관문을 두드릴까 봐. 그 생각에 사로잡혀 밤만 되면 현관 앞을 서성이며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누를 길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렇게 보낸 많은 밤이 지나 또 다른 누아르가 시작됐다.


어디가 가장 불편하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대답이 늦어졌다.


“그냥, 잠을 자고 싶어요.”


늘 머리가 무거웠다. 날이 선 예민함에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또 다른 스트레스에 날이 갈수록 더 예민해져 갔다. 구부러지지 못하고 뚝 끊기며 부러지는 나 자신이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만 외면했다. 잘못 살았다는 반증일까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머리와 귀 그리고 팔뚝과 손가락 발가락 몇 군데에 침을 맞았다. 몇 개의 바늘이 내 이십여 년을 관통해 맥을 잘 짚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병을 고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글귀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럼 난 선생님을 믿어야 하는 거겠지. 그리고 내가 겪고 있는 이 증상은 ‘병’이라는 이름인 거겠지.


한 가지 좋았던 점은 생전 처음 보는 이에게 내 아픔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연관된 사람일수록 아픔을 나누는 일은 어렵고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만 각인시킬 뿐이었다. 선생님과의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색함이 무뎌졌고 스스로 좋은 징조라 여겼다. 어떤 날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라는 말 뿐이었는데 나는 그게 좋았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서울 나들이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병원에 다니지 않는다. 내 우울함과 강박과 공황이 명의 혹은 몇 가지 약으로 고쳐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저 내 어두운 부분을 밀어내기보다 내 곁을 조금씩 내어주며 어색하지 않게 친해지는 것. 나아가 스스로 조절 가능한 상태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를 위한 첫 발걸음으로 나를 글로 꾹꾹 눌러써 내려가고 있다. 아프고 슬프고 불안한 모든 것을 억지로 잊고 외면하며 살아왔던지라 다시 꺼내어 차분히 들여다본다는 것이 쉽진 않은 일이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쉬운 일은 없기에 천천히 한량인 듯 해 나가다 보면 내가 나를 온전히 마주 할 날이 오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 매 년 십일월 사일이 되면 그 날이 생각난다. 서른이 넘어서야 생각했다.

아빠 생일인데, 미역국도 못 드셨겠구나. 내 밤이 두려운 것만 생각했지, 아빠의 낮과 밤은 어땠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음 생을 기약한다면 아빠가 돼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 내고 싶다.

아빠의 누아르가 아빠 자신은 아니었길 바란다.

의지와 허울 없는 망상, 그 사이에.


가끔, 빛이 없는 어둠과는 다른 어둠이 마음을 일렁일 때가 있다.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일렁이다, 지칠 때쯤 찾아오는 고요 속에 편안함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의지와 허울 없는 망상 그 어딘가에 찍혀있을 점만큼 작지만,

점이 아닌 여백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내가 원하던 편안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사는 것이 한 번씩 버티기 어려울 만큼 힘들고,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바닥을 서성일 때,

형체 없는 상상을 통해 거짓으로 편안함을 찾곤 한다.


거짓과 진실.


구분 지으려 하지 않고, 그저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

오늘도 내 무덤을 파고 관속에 누워 고요한 하늘을 바라본다.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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