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의 시작
늘 하고 싶은 일은 많았고, 시간은 부족했다. 지금도 그렇고 지금보다 더 어릴 때도 그랬다. 이 일도 해보고 싶고, 저 일도 욕심이 나서 하루하루 숨가쁘게 살았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어느 시절에는 프로야구단의 스카우터가 되고 싶었다. 야구에 미쳐서 매일 저녁 야구를 보고 그 뒤에 이어서 하는 하이라이트 방송까지 챙겨보던 때다. 신고선수 출신이라는 어떤 선수가 중요한 경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치는 장면은 새로운 꿈을 꾸게 했다. 늘 패전 처리만 맡던 투수가 중요한 순간에 삼진을 잡으면 리모컨을 잡은 내 손이 떨렸다. 스피드건을 들고, 근엄한 표정으로 뭔가를 메모하는 스카우터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그 뒤에도 여러가지 꿈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어떤 날은 변호사가, 어떤 날은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가장 오랜 시간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던 일은 기자였다. 멋진 취재기를 듣거나 공들여 쓰인 기획 기사를 읽으면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저 곳에서, 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2년 간은 기자로서의 내 미래를 상상하고, 그 상상을 현실로 끌어내리려 애쓰면서 지냈다.
손 안에 넣고 싶은 직업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 긴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그 직업을 갖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고 싶었다. 내 말, 내 글이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았으면 했다.
지금 정착한 곳은 네이버웹툰이다. 퍼포먼스마케팅 중남미팀에서 한달 전부터, 인턴 기간까지 포함하면 네달 전부터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 잘 읽히지 않는 지구 반대편 문학, 중남미 문학에 나는 늘 진심이었다. 이제는 내가 중남미 사람들에게 한국의 웹툰을 팔 차례가 온 것이다. 결국 지금 하게 된 일, 마케팅도 생각으로 사람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
회사가 있는 판교라는 지역은 강한 상징성을 가진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숫자에 울고 웃는 일과는 평생 거리를 두고 살아온 내가, 노트북에는 시, 소설, 전공 관련 논문뿐인 인문대생이 판교에 섞일 수 있을까 싶었다.
사실 지금도 나는 내 자신을 의심한다. 의심하면서도 늘 모든 일에 그래 왔듯 온 힘을 다한다. 마음이 불편할 때면 이 일, 이 곳은 ‘내’가 아니라 ‘내 상태(status)’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상태는 머무르지 않고 움직이는 거니까, 이렇게 되뇌이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일에 욕심 냈다가, 일과 거리를 뒀다가 하는 진동과 밀당이 시간 단위로 반복된다.
이제는 ‘일’ - 일하는 행위, 일하는 공간, 일하는 시간 - 에 대해 깊이, 천천히 생각해 보고 싶다. 워킹아워 내에 진동하는 마음에 대해, 아쉽게도 이루지 않기로 선택한 것과 얼떨결에 이루게 된 것에 대해, 주 5일 재택근무가 빚어내는 사건과 정서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다. 오늘 써내려 간 이 문장들은 앞으로 쓰게 될 긴 글의 서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