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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예 Jun 15. 2020

일상적인 책읽기와 번역의 무거움

책을 읽으며 매일 느끼는 것에 대하여 

작년 겨울 평소 좋아하던 작가님과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작가님만의 독서법이 있는지 질문했다. 쓰는 사람은 곧 읽는 사람이니까, 결국 읽는 법에 대한 질문이 소설 쓰기에 관한 질문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작가님은 한 번에 한 책만 읽지 않고, 몇 권의 책을 함께 읽는다고 답하셨다. 


나 역시 한 번에 한 권의 책만 읽지는 않는다. 정말 좋아하던 사람의 말 한마디에 실망하고, 그 사람과 싸워야만 할 때가 있듯이 나와 책의 관계도 자주 바뀌기 때문이다. 술술 읽다가도 어떤 말, 어떤 표현에서 갑자기 멈추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 내 손이 닿는 범위에 책이 한 권 더 있어야 한다. 


그렇게 두세 권을 오가며 읽는데, 주로 한 권은 한국문학, 다른 한 권은 외국문학이다. 만약 남은 한 권이 있다면 비문학이다. 이 조합은 나에게 ‘즐거운 강박’이다.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정하게 된 것은 아니고, 이 책 저 책 읽다 보니 서서히 만들어진 규칙이다. 이 규칙이 지켜지면 거기서부터 오는 균형에 안정과 즐거움을 느끼고, 지켜지지 않으면 좋은 책을 찾아내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과 설렘을 느낀다. 


교환학생 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 그 이전보다 눈에 띄게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아무도 모국어를 쓰지 않는 멕시코에서 박상영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큐큐퀴어단편선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 한국에서 사 간 단 두 권의 책 - 는 마음이 지칠 때마다 찾게 되는 대피소였다. 물론 외국에 가기 전에도 한국문학에 대한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계간지와 몇몇 수상작품집을 꾸준히 읽었지만, 타지에서 읽는 모국어 표현, 문장들은 한국에서 읽던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시집도 한 권 사올걸, 하고 아쉬워 할 때가 많았다. 


스페인, 중남미 문학 외에는 외국문학을 잘 읽지 않았는데(책장에는 중남미 작가들의 책만 가득하다), 올해 초 처음 읽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이 시야를 넓혀주었다. 이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과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번갈아 읽으면서 모국어 화자가 모국어로 쓴 작품과 번역을 거친 작품이 가진 미묘한 차이를 겪었다. 


전자를 읽을 때에는 모국어 화자여야만 200% 이해할 수 있는 표현에 마음이 움직여서,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마음이 통했을 때 또는 친구와 나의 차이를 공유할 때와 같은 감격을 느끼게 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글쓴이와 나 혼자 내적 하이파이브를 한다. 후자를 읽을 때에는 처음 누군가를 알게 될 때의 설렘을 느낀다. 나와는 다른 표현 방법,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과 대화하며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말의 이면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을까 고민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훌륭한 외국 작품을 찾으면 ‘아, 이 분과 나는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겠구나’를 직감할 때와 비슷한, 편안한 기쁨을 느낀다. 이 새로운 만남을 주선해주는, 많고 많은 사람들 중 나와 상대를 이어주는 존재가 번역이다. 


번역은 매개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외국문학을 모국어로 소화해서, 그 에너지와 결과물을 통해 모국어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힘찬 ‘주체’다. 새내기 때 ‘서문과, 불문과, 독문과, 노문과, 영문과 등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함’이라는 선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대학생이 된지 불과 몇 달이 지났을 때라 그 말의 뜻을 잘 몰랐다. 우연히 한국, 외국 문학을 오가며 읽기 시작한 요즘에서야 그 의미를 흐릿하게나마 알 것 같다.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 말의 배경에는 ‘번역’의 존재가 있다. 번역이 있어야 외국 문학이 한국문학의 작가들과 독자들을 만날 수 있다. 외국 문학의 작가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쓴 표현은 번역을 통해 한국 작가들과 독자들의 마음에 녹아든다. 한국 작가들의 마음을 움직인 번역가의 문장은 새로운 한국문학을 낳는다. 이로써 번역과 외국 문학은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도움을 준다. 반대로 번역 덕분에 한국문학이 누군가에게 외국 문학이 되기도 한다. 많은 번역가들이 어문계열 학과에서 배출된다는 점에서 그 때 선배의 말에 공감할 수 있다.


결국 한국과 외국 문학을 번갈아 읽는 지금, 책읽기는 나에게 언어의 세계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언어의 매력과 한계는 둘 다 무한하다는 것을 천천히 이해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요 며칠은 정미경 작가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과 모옌의 <개구리>를 읽고 있다. 역시 전자는 편한 사람과의 대화에서 때때로 느끼는 기분 좋은 충격, 후자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서 느끼는 익숙하고 편한 행복감을 준다. 마음 놓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진 않지만,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쉴 때와 자기 직전 만큼은 당연하다는 듯이 책을 찾게 된다. 이렇게 책은 나의 방, 일상, 세계, 그리고 나의 부족한 배움에 있는 틈을 채워 주고 있다. 오늘은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선물받았는데, 몇 페이지 읽었을 뿐인데 벌써 아껴 읽고 싶은 책이 되었다. 좋은 사람에게 좋은 책을 선물받아 또다른 틈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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