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라이팬으로 시작된 중딩 표류기
에피소드(1) 중딩 표류기
그 날은 학원 보충이 있는 날이었다. 집과 거리가 있어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는데 평일에는 셔틀 버스를 탔기에 혼자서 버스를 타고 가는 첫 날이기도 했다. 중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보충이 있는 걸 까먹었는지 부엌에서 학원의 전화를 받은 엄마가 후라이팬으로 내 등짝을 후려쳤다. 말로 해도 갈텐데 왜 때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을 나섰다. 20번이었나 220번이었나 몇 번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좌석버스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디쯤 내려야 하나 창밖을 보다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다음에 내려서 걸어갈까? 에라 모르겠다. 종점까지 가보자. 그 때만해도 버스타고 혼자서 분당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대책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버스는 분당을 돌고 돌아 고속도로를 타서 종점에 도착했다. 사실 종점이라고 이야기가 나와 내린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다 내리길래 내리면서 기사 아저씨한테 물어봤더니 종점이라고 하여 내렸다. 여긴 어디? 난 누구? 아, 사람도 많고 차선도 겁나 넓다. 8차선 정도 되는 도로를 보면서 이제 어떻게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까 대책이 없다고 생각했던 건 시작에 불과했다. 나에겐 집에 올 차비도 없더라. 분명히 학원에서 오려면 차비가 필요했을 텐데 난 왜 차비를 안 갖고 있었을까. 20년이 지난 뒤에 이런 생각을 하면 뭐하나. 그래도 살아있음?에 감사하자. 집에 가는 버스는 어디서 탈까. 좀 애가 맹했던 것 같다. 상식적으로 반대편에서 타면 될 것을 나에겐 그런 상식도 없던 지라 정류장 앞 가게에 있는 아줌마한테 물어 집에 갈 때는 맞은편에서 버스가 출발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 이제 차선만 건너면 돼. 첫번째 미션을 클리어했으니 이제 두번째 미션을 클리어할 때다. 8차선을 건너자! 횡단보도를 찾으니 너무 멀리에 있었다. 그래서 무단횡단을 하기로 마음먹었다.(ㅋㅋㅋㅋㅋㅋㅋㅋ 사고의 흐름이 희한하다!) 그 때만 해도 무단횡단과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비일비재한 일이었기에 별 일은 아니었지만 소심한 나에겐 실행력이 필요했다. 기회를 엿본 후 차들이 신호에 걸렸을 때 무단횡단을 감행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 뒷통수가 따가웠지만 맞은편 정류장에 발을 딛고 나니 이제 집에 갈 확률이 더 높아졌다는 안도감에 괜찮아졌다. 세번째 미션은 차비를 얻는 것. 시간을 보니 1시간이 지나 있었다. 집에 가는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인상 좋아 보이는 사람을 물색했다. 아저씨는 무섭고, 아줌마는 왠지 까다로울 것 같고, 젊어보이는 여성을 공략해야겠다 생각했다. 20대 초반의 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흔쾌히 차비를 내주었다. 감격의 탑승 클리어!
엄마는 학원에 갔다온 줄 알았지만 나는 그저 서울에 갔다 왔을 뿐. 참, 내가 내렸던 종점은 양재역이었다. 내 생애 처음 해본 버스 여행(이라 쓰고 표류라 읽는다)이었는데 이 맹한 경험은 신기하게도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이 사건을 바로 말하면 엄마한테 다시 후라이팬으로 맞을까봐 내 기억 속에 묻혀졌다가 10년 후에 오픈됐다. 엄마 말만 잘 안 들었을 뿐, 얌전한 아이였기에 학원 땡땡이를 친 것과 8차선 도로를 무단횡단 한 일 그리고 차비를 적선한 것 등 일탈로 치면 하루에 3타를 친 것이다. 지금에서야 그 때의 내가 대견하지 그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고, 횡단보도가 너무 멀었으며 집에 가려면 차비를 얻었어야 했을 뿐. 어쩌면 난 기분이 나빴던 것일 수도 있다. 엄마가 후라이팬으로 등을 후려쳤고 기분이 나빴으며 학원이 가기 싫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 그 때의 감정에 대해선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낯선 상황에서 무언가를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고 했던 경험은 중학생이었던 나의 정서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차비를 내줬던 그녀에 대한 고마움이 나의 10대 시절의 기억 저장소에 남아있다는 것이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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