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난다. 아주 어릴 적에 머리에 이잡던(80년대생인데요, 그랬습니다) 시절에 몇몇 곤충을 못살게 굴었던 기억이. 생명 경시 행태를 지녔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 (좋아하는) 동물에만 부쩍 생명 존중을 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비 오기 전날 혹은 비가 온 후에 지렁이들이 길에 나뒹군다. (지렁이는 비가 좋아 흙밭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 익사?하지 않기 위해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나온 지렁이들이 때맞춰 흙으로 돌아가지 못해 햇빛에 그대로 노출될 때 지렁이를 지나칠 것인지 흙으로 돌려보낼 것인지 고민한 적이 있는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주위에 얇은 나뭇가지가 있는가. 지렁이의 생존확률이 꽤 괜찮아 보이는가. 나는 코천이 산책 등 한가한 편인가. 이 세 가지를 충족시킨다면 지렁이를 그늘흙으로 던지는(살려주는) 것을 선택한다. 그렇게 한다고 지렁이가 특별히 더 오래살 거라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지금 햇빛에 타죽는 것보다 내 눈에 띄지 않을 때 죽는 것이 낫다고 나는 결정했다. 그래서인지 남들이 보지 못하는 (내가 싫어하거나 혐오?하지 않는) 생명체를 자주 발견한다. 빗속에 보도블록을 지나가는 달팽이를 발견하고 밟지 않거나 길가에 어쩌다 새가 죽어 있으면 그렇게 안타깝다. 서론이 길어졌는데 그래서 오늘의 본론은 버스 정류장에 있으니 할머니와 손자가 대화를 나눈다. 손자의 두 손에는 매미 한쌍이 들려 있는데 두 마리의 매미에게 다리싸움을 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쟤는 저걸 어디서 잡았대. 나는 매미가 징그러워 가까이 하진 않지만 매미를 괴롭히는 건 그냥 괴롭다. 저러다 말겠지? 괜히 매미 못살게 굴까봐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 매미가 차도를 잘 건너가는지 시험해 보고 싶다면 차도에 날리는 아이. 다행히 한 마리의 생명은 건졌고. 나머지 한 마리는 아직 손에 있다. (버스는 왜 이리 안 오는 것일까) 할머니는 손주가 마냥 예쁘다. 한 마리가 붕하고 날아갔으니 한 마리도 또 시험해 보고 싶은지 또 날려본다. 다행히 두 마리 다 생명을 건졌다. 휴- 하고 한숨 놓았더니 어디서 매미 한 마리를 또 잡아 왔네. 쟤는 매미가 7년에서 13년 동안 땅 속에서 유충으로 있다가 세상에 나와 2주일동안(암컷은 한달) 짝짓기를 위해 매일 울다가 죽는다는 것을 알까. 물론 알아도 그것보다 자신의 호기심이 더 강한 나이니 별로 상관 안하겠지. 나 역시 어릴 적에 생명 경시 행태를 지녔던 아이니까. 그래도 쟤는 나보단 나아 보인다. 그렇게 매미의 괴로움(짝짓기도 못하고 죽을까봐 계속 버둥거렸다)이 나에게 전달되어 심히 괴로운 와중에 버스가 왔고 다행히 버스를 타기 위해 세번째 매미도 날려주었다. 그 아이는 한 10살쯤 되어 보이던데 너가 손에 들고 있는 매미가 너가 태어났을 때부터 10년 동안 살다가 이제 성충이 되어 바깥에서 14일을 살고 있다고 말해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직 어려 이해하기는 어려울라나? 생각보다 매미잡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으니 매미들이 아주 높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