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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자 글쓰기] 172. 부탁에도 맥락이 필요해

by 이문연

가까운 사람한테 하는 부탁일 수록 맥락은 필요없을까?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게 맞을까? 사람은 그렇게 생겨먹지 않았고,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관계의 복잡성에 따라서 그 대응은 달라진다. 여동생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지 않아 트러블이 생겼고, 그 트러블의 맥?을 짚기 위해 한참 생각했다. '난 뭐 때문에 흔쾌히 들어주지 않았지?', '걔는 왜 가족이라면 자신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지?'. '가족이라면 어떤 부탁이든 흔쾌히 들어줘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나갔다. 한달이 지났다. 내가 내린 결론은 부탁에도 맥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뜸 '부탁이 있어'라고 말하는 것보다 '사정을 먼저 말한 후에 부탁이 있는데 해줄 수 있냐'고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부탁이 있어'라고 말하는 건 의사를 물어본다기보다는 일방적인 통보에 가깝다.

우리는 지금까지 맥락없이 부탁을 들어왔고, 맥락을 유추해서 부탁을 들어줬다. (물론 매너 있는 사람은 먼저 부탁의 상황을 말할테지만 사람의 행동이라는 것은 사소한 것부터 학습되어온 것이므로 이러한 것들이 학습되지 않는 이상 '잘못'된 것이라고 인지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부탁을 한다면 어찌되었든 부탁할 만한 상황이 있는 것이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러한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고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관계의 깊이 또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예민한 분야에 따라) 관계의 깊이 또는 신뢰는 상대적이기에 평소에 친하다고, 가깝다고, 신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어도 부탁을 하는 것에는 맥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곧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고 매너가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부탁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다.

그래서 부탁을 한다면 적어도 내가 왜 이런 부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상대방에게 미리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 부탁을 잘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 혼자 해보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설명 혹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거나 구차하다고 느낄지 모른다.(내가 좀 그런 편이다) 하지만 어쩌면 사람들은 부탁을 '매너있게 받아본' 경험이 적고, '일방적으로 통보'(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받는데 익숙하다보니 이걸 거절하면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을까, 상처받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하게 되는 아이러니에 빠지는 것이다. 부탁을 받는 사람은 그 부탁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 맥락적으로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나만 그래요?) 그렇기에 부탁을 받았을 때 '고민해보고 말해줘도 돼?'라고 묻는 것에 부탁을 하는 사람이 기분나빠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탁은 (부탁을 받는) 상대방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의지받는 것은 상대방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도 되지만,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맥락을 담아 부탁하는 성의는 필요한 것이다. 아마 내가 누군가에게 맥락없이 부탁했을 때 그 사람이 '흔쾌히'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정말 고맙겠지만, '고민해보고 알려줘도 돼?'라고 말한다 해도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그 생각은 존중받아야 한다. 부탁을 잘 하는 사람은 부탁도 잘 들어주는 편이다. 부탁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은 부탁도 신중하게 들어준다. 이 차이를 잘 알고 있다면, 부탁을 하는 행동이 단순히 '부탁'하나로만 상징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승낙과 거절 사이에는 다양한 고뇌가 있다) 관계는 서로의 입장(생각/성향/상황) 차이를 이해하고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깊어진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게 부탁에서는 맥락이고 우리는 그 맥락을 위해 시간와 에너지를 쏟는 것을 아까워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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