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오줌권을 박탈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by 이문연

정신 병원이나 요양원, 장애인 시설에서 수개월, 길게는 수십 년을 사는 사람들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장애가 있거나 환자이거나 작은 공간에 갇혀 있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존중받지 못하고, 나아가 오랜 집단 생활을 통해 인격을 아예 소거 당하기 때문이다. 고유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인간은 흐릿하게만 기억되고, 번호나 기호로만 존재하며(교도소가 수인번호로 재소자를 호명하는 이유는 그의 개별적 인격성이 제한된 상태임을 드러낸다), 특정한 장애나 성적 지향, 성별, 인종 등으로만 호명된다. 나라는 사람은 존중하지 못할 때는 그냥 한 사람의 장애인이지만, 존중받을 때는 장애를 가진, 그리고 그 밖에 이러저러한 특성과 이야기를 가진 김원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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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잘못된 삶’이란 착하지 않거나 나쁜 짓을 저지른 삶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하는 삶,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격당한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장애나 질병이 심하고, 다수가 혐오하는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잘못된 삶’이 되기 쉽다. 이들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작성해나가는 ‘삶의 저자author’들이지만, 이들을 배제하고 밀어내고 낙인찍는 사회적 관행과 정치적 힘, 그리고 자기 존재를 발전, 확장, 농축할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정치경제적 구조 때문에 ‘잘못된 삶’이라는 낙인을 안은 채 사회 밖으로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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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함에는 단계가 있다. 첫째, 자신의 몸이 가진 기능적 한계를 몸의 다른 기능으로 대체하는 기술과 아이디어를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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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단계의 노련함은 상호작용의 기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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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의 삶이 저 두 종류의 노력함으로 깔끔하게 돌파 가능할 만큼 허술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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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인 질병이 있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은 물론이고, 어떤 이유에서든 두드러지는 혹은 아름답지 않은 외모라 평가받는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할만한 나이가 되면, 자신이 통과해야 할 길을 자각한다. 그 길은 삶의 시간 전체에 걸쳐 뻗어 있는 어둡고 거칠고 외로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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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을 때는 수치심을 느끼지만, 절벽 끝에 매달렸을 때는 스스로를 관찰하는 반성적(성찰적) 시선을 잃기 때문에 수치스러울 겨를이 없다. 이 때 우리의 의식에서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일치한다. 오로지 하나의 감정, 한 명의 존재, 유일한 현실만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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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 모르는 척 해주는 익명의 대학생이 고마워서 그를 존중하며, 자신을 존중하려 애쓰는 자폐아 부모의 노력을 아는 대학생은 더더욱 무심한 척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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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다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positive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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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수행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예술품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가령 반 고흐의 그림을 최고 성능의 컬러복사기를 이용해 복제한다면, 그 그림은 고흐의 원작과 다를까? 수준 높은 미술평론가들조차 원작과 모작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라면, 양자의 '산물로서의 가치'는 동등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원작이 더 가치있다고 믿는다. 왜 그런가? "위대한 예술품에 가치를 두는 궁극적인 이유는 예술품이 우리의 삶을 증진시켜서가 아니라 예술적 도전에 맞선 수행performance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골형성부전증'이나 '암' 또는 청각장애가 가치 있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산물로서의 가치보다는 수행으로서의 가치를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수평적 정체성으로서 옹호하고자 하는 장애나 질병, 너무 크거나 작은 키, 인종, 특정한 정신질환, 성적 지향 등은 한 사람이 어떤 경험과 도전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역사가 체화된 인간적 속성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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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를 나갈 때도 나의 고민은 늘 오줌이엇다. 장애인 화장실은 최근에는 도시에서 제법 만나게 되었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오줌이 마려워 초조해하는 모습이 상대방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리가 없다. 안절부절 못할 상황에 되면 나는 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을 뿐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끼니 정도는 쉽게 거르지만, 아무리 매력적인 상대 앞에서라도 화장실에 가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내 지인은 모든 권리 가운데 '오줌권'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라고 단언했다. 진지하게 말해서 '호흡할 권리'를 제외한다면 맞는 말 아닌가. 모두가 어디서든 편안하게 오줌을 눌 자격이 있다는 '오줌권'은 필수적이고 정당한 권리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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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 환자를 위한 스타일 강의를 요청 받은 적이 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이기도 했고, 내가 원하는 방식의 강의가 어려워서 결과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줬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강의를 하면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태도나 말을 '나도 모르게' 하면 어쩌나 하는 부담감도 적극적으로 강의를 수주하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의 저자는 다리 근육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것에 대해 그리고 장애인들이 개인의 욕망과 능력과는 별개로 사회에서 얼마나 소외되어 있는지를 담담하게 써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예전의 일이 하나 떠올랐다. 아마 6,7년전 쯤이었을 거다. 광화문 교보 근처의 커피숍에 앉아 있는데 창문으로 버거킹 매장이 보였다. 추운 겨울이었고, 아마 영하의 온도로 기억한다. 휠체어를 탄 사람과 그 휠체어를 끌어주는 한 사람. 두 명이 보였다. 한 명은 매장으로 들어갔고, 휠체어를 탄 사람은 매장 문 앞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그 당시 나는 그 상황을 안타깝게만 쳐다봤다. 매장 문은 휠체어로 올라갈 수 없는 높이에 있었고, 그 분이 매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단지 매장의 문이 경사로가 아니기 때문에 휠체어를 탄 사람이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휠체어를 같이 들고 매장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사회가 두 팔, 두 다리가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 위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라면 휠체어를 타고 그렇게 밖에서 떨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내가 내려가서 도움을 제안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따뜻한 카페 안에서 책을 읽으면서 한 생각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다시 왔을 때 진짜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다. 책의 내용 중에 충격을 받은 건 '오줌권'에 대한 내용이다. 살면서 한 번도 생리 현상에 대한 권리를 박탈 당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포항에 강의하러 가다가 새벽에 터미널에서 사먹은 김밥이 잘못되서 지옥을 경험한 일 빼고. 그것도 박탈당한 건 아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을 뿐) 그런데 장애인들은 외출과 동시에 생리현상을 걱정해야 한단다. 장애인 화장실이 생기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장애인 화장실이 없는 건물이 무수히 많다. 심지어 공공기관 조차도.


어떤 건물의 1층 화장실에서 '장애인 화장실은 4층에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장애인이 아니라도 심히 빡칠만한 문구다. 빡친 것만으로만 그치면 다행일까. 생리현상을 자연스럽게 해소하지 못하는 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화장실을 찾지 못해 길거리에서 작은 일(큰 일이라고 가정해보면 더 와닿을까)을 보게 된다고 상상해보라. 그래서 저자의 생리 현상(물론 이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에 대한 설명은 탁월하다.


이런 책을 읽어도 여전히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부족하다. 주변에 장애인이 있지 않고, 장애인의 삶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한, 평생 장애인이 어떻게 사는지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나도 책의 자세한 내용을 곧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애인을 봤을 때 '장애인'이라는 인식보다는 장애는 그 사람이 가진 하나의 특성이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저자의 말처럼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개인의 개성을 너무 잠식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장애인과 비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너무 크다. 사회 시스템도 그렇고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고 바뀌어야 할 것 투성이지만 이런 책으로 인해 조금씩 나아질 거라 믿고 싶다.


비장애인인 나는 장애인의 오줌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런 인식의 변화가 사회 불균형의 무게를 조금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비장애인이기 때문에 이런 짧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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