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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연 Jun 03. 2019

사우나에서(2) 그녀들은 양해를 구하지 않는다.

내가 보통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는 시간은 4시 반에서 6시 사이
그 시간엔 초등학생들과 5,60대가 가장 많다.
조잘조잘 돌고래 소리가 난무하지만 가장 여유롭고 느긋하게 사우나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다.

반면 약속이 있어서 좀 일찍 샤워를 하게 되면
오전부터 3시까지는 평균 70대 중,후반 분들이 많고
그들의 숫자는 샤워부스의 숫자를 압도하므로
자리를 차지하는 게 쉽지 않다.

사람이 빠지는 즈음에 샤워 부스를 이용하면 되지만
그렇게 일찍 가는 날 때를 밀게 되면 앉는 자리를 이용해야 하므로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 2시 15분쯤 자리를 잘 잡아서 때를 밀기 시작했다.
보통 수영 한 타임이 끝나는 시간이 50분인데
35분부터 한 두분씩 나와 슬금슬금 씻으신다.

오늘같은 날은 처음 이었는데
한 분이 내 오른쪽에 앉았다.
오른쪽 샤워기 자리에 앉은 게 아니라
오른쪽 샤워기와 내 샤워기 사이의 빈 공간에 앉으셨다.
그 분과 단짝처럼 보이는 또 한 분이 내 왼쪽에 앉으셨다.
마찬가지로 샤워기 자리가 아닌 빈 공간이다.

사람이 많다보니 샤워 부스를 차지한 분들과
그 사이 빈 공간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같이 씻는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엉겁결에 2분과 샤워기를 공유하게 되었다.

아마 불청객(메이비 나)이 없었다면
그녀들의 자리(보통 가방으로 선점해놓으므로)였을 것이다.
때를 거의 다 밀었을 즈음이었고
머리도 감고 얼굴도 씻고 그 이후의 순서가 많았는데
계속 앉아서 셋이 같이 씻을까 생각하다가
선택권이 많은 내가 양보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때를 다 미는 것과 동시에 서서 씻는 샤워부스로 옮겼다.

70대 이상의 그녀들은 체형이 거의 비슷하다.
배가 많이 나왔기에 상대적으로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갈 수밖에 없는 체형.
탕에 들어갈 때도 온전히 두 다리로 들어갈 수(능력의 범위다) 있는 분들이 드물며
몸을 다 씻을 때까지 서서 씻는 것은 허리에 무리를 주고 불편하므로 불가피하게 앉아서 씻는 곳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들이 양해를 구하지 않고 나와 밀착해 몸을 씻는 것이 썩 기분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녀들이 왜 그렇게 씻을 수밖에 없는지
그녀들의 몸이 게으름의 소산이 아닌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로 살기 바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기분 나빠할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왜 같이 사용해도 되냐고 묻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긴 했다)

어쨌든
그녀들을 볼 때마다
‘두 다리로 우뚝 서 있다’라는 기분이
나이듦에 따라 옅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미리미리 관절 건강을 챙겨야 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앞으로 가급적 때는 4시 반 이후에 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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