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에서(5) 임자있는 수건

by 이문연

이 사건은 2년 전부터

아주 띄엄띄엄 일어났다.


헬스장은 1인에게 수건 2장씩을 준다.

다만, 예외가 있는데

수건감당이 안되는 아동들과

오전반의 할머니들께는 수건이 지급이 안 되더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할머니들이 수건을 쓰기 위해서는

5,000원의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아마도 안 내고 안 쓰는 분들이 계셔서 그런 건 아닐까 짐작해본바


오늘은 수건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심적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는 늘 2장의 수건을 받으면 그걸 3번 고이 접어

정사각형으로 만든 뒤

사우나에서 탈의실로 나가는 문 옆의 선반

(그 선반은 많은 이들의 짐으로 붐빈다)에 놔둔다.


그러면 씻고 나갈 때 편하기도 하고

딱히 그 곳이 아니면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수건이 없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나는 탕에서 20분, 사우나에서 10분 정도를 소비하는

아주 느긋하기 그지없는 샤워패턴의 소유자라

수건의 실존여부를 전혀 확인하지 않았는데

그러다보면 어느 날은 수건이 없어져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탈의실을 관리하는 여사님에게 수건을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 발생.


1) 수건이 없어진 건 나의 탓이 아님에도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함

2) 수건은 밖에서 가져오는 것이 원칙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함

3) 처음에는 사용할 수도 있지라고 좋게 생각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이런 일이 생기면 열받기 시작


사실 이 모든 것들보다 가장 중요한 게 있는데

그건 내가 수건을 감시?하느라 사우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속세의 번뇌를 떨치기 위해서 탕에서 고요함을 즐기다가도 수건을 봐야 하고

번뇌와 같은 때들에게 사요나라를 외치다가도 수건을 확인해야 하며

사우나에서 번뇌같은 땀을 막 흘리면서도 누가 수건을 가져갈까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한 번은 현장에서 범인?을 잡았는데

선반에 있는 '고이 접혀 있는 수건'이라서 사용해도 되는 건 줄 알았다고.


그 아주머니는 열심히 닦던 수건을 미안하다며 나에게 도로 주셨는데

1장은 쓰시라고 드렸다. 어차피 닦으셔야 하고 나도 1장으로 아껴 쓰면 되니까.


그래서 이런 일을 몇 번 겪고나니 뭔가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우나 경력 2년 3개월만에 수건에 [명패]를 달기로 했다.


'가져가지 마세요' 음...너무 부정적이다.

'주인있는 수건' 주인? 테크니컬리 내가 주인은 아닌데...주인이라는 말이 좀 거창한 거 같기도 하고.


난 이런 사소해 보이는 일에 가급적 '위트'를 넣고 싶어하는 입장이라

이유는 같은 말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완전 다르고

주3일 사우나를 이용하는 입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명패?에

고압적이고 부정적이고 재미없는 말투를 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주인있는 수건'이 단순하고 명료하긴 한데

'주인'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든다.

뭔가 '내 꺼'라는 의미를 포함하면서도 사람들이 봤을 때 풋!하고

속으로라도 '웃긴다'라고 느낄만한 단어...


그러다 [임자]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주인이나 임자나 뜻은 둘 다 '어떤 것을 소유한 사람' 이지만

임자는 배우자를 뜻하기도 하니 좀 더 친근해보이고 재치있(내 생각)다고 생각해 결정.


그래서 알파문고에 가서 손바닥 반만한 크기의 명패에

[임자있는 수건]이라고 크게 써서 갖고 다닌다.

수건 위에 명패를 같이 올려놓으니


누가 수건을 갖고 갈 일도 없고

나는 사우나에서의 자유를 되찾았으며

명패를 본 어떤 이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나에게 '자유'에 대한 의미를 다시 느끼게 했는데

명패의 가격은 1,700원짜리지만

나에게 그 가치는 사우나에서의 1시간을 온전히 즐기게 하는 것이다.


앤드 관리자 여사님께 원칙에 대해 들을 일도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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