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1. 14. 수
2026. 스물(20),스물여섯(26).
소리 내어 말하니 생동감 있고 좋은 울림을 가진 숫자같습니다. 스물에 아름답던 일출이, 마흔을 넘어서도 또다시 아름답습니다(분명 아름다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새해 첫날에는 꼭 해돋이를 보자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잠이 늦어졌고 눈을 떴을 때는 늦은 오후. 해거름(노을?) 한 덩이가 겨우 창 턱에 걸려 뺨을 스쳤습니다.
올해도 낮에는 나무를 켜고, 자르고, 조각합니다. 나무를 만지고 다루는 일이 좋습니다. 부재와 부재를 잇는 장부와 이음처럼 내 삶도 연결성이 좋았다면 더 근사한 일이 되었겠지만 사실 현실은 바라는 것보다 서늘한 틈이 더 많습니다.
맞지 않는 자리에 어울리기 위해 몸을 깎아내며 견뎌온 무결한 진심을 위해서라도, 26년에는 부디 그 틈 사이로 자책을 밀어 넣지는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새해에는 소박한 단어의 본질을 살펴보는 사려 깊고 소소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인 영역에 여기저기 글을 투고해 보기로 했습니다. 담백하고 고요하게 수수한 삶을 살고 싶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곁’, ‘결‘, ’극’
낱자로 된 세 단어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나‘라는 일인칭의 존재만으로는 차지할 수 없는, 그러니 나 이외의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영역. ’옆‘ 보다는 조금 더 깊은, ’나‘와 ’옆‘, 그 사이 어딘가.
목공방의 원생들과 나는 서로 옆을 내어주는 것에 가깝고, 오랜 친구와는 곁을 내어주는 것에 가깝습니다. 낱자 ’곁‘과 ’옆‘을 살펴 그 사이의 거리감을 바라보면 사람과의 신뢰를 가늠해 보는데, 얼마간 보탬이 됩니다.
저도 해가 바뀌었다고 갑자기 무언가를 더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모두와 같습니다. 그냥 그대로. 여전히.
그 마음은 회피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삶이 나를 안아주는 일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나무는 상처를 붙잡고 의미를 묻지 않고 그저 시간을 ’곁‘에 둡니다.
손이 닿거나, 살며 경험하는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거의 모든 감촉을 의미합니다. 부드러운 결은 안도와 안식을 주고 세월과 시간의 결은 존경과 두려움을 넘어 경외심을 갖게 합니다. 섬세한 결은 감각을 깨우고 다난하고 복잡한 결은 단조로웠던 하루의 시선을 다르게 만들어 줍니다.
어디에나, 언제나 있습니다. 나와 결이 다른 사람. 도무지 섞이지 못하는 마음 같은 것들.
저는 무엇이 왜 힘든지도 설명하기 싫은 날, 조용히 나무를 바라봅니다. 나무는 모든 계절에 자라지 않습니다. 자라지 않는 시간을 실패로 여기지 않습니다. 성장과 쉼, 그 사이에 나무는 결을 만듭니다. 결이 쌓이고 쌓여 나무의 나이테가 됩니다. 나무의 그것처럼 저만의 결이 만들어질 날이 있을 거라 믿으며 기다리고 견딤의 시간을 보낼 생각입니다.
흘려보낸 과거의 나는 어디를 통과하는 중일까요. 새로운 내가 태어나가 위해 죽어가는 중일까요. 각자의 극. 반대편으로 향하는 나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나를 흘러간 나에게 약속합니다.
서로 다른 시간에 서 있겠지만 서로를 관통해 본 적 있고 어디에서든 존재하는 법을 알게 될 테니 언젠가는 같은 극으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당신과 아직 죽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다짐이고,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