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의 작은 목공방입니다.
사각사각 나무를 다듬다보면 고민과 아픔, 많은 생각들은 흩날리는 톱밥처럼 밀려가고 번잡했던 머릿속은 단순해집니다. 폴폴 피어오르는 나무 향이 고요하게 사람의 마음을 치유합니다.
동일한 규격으로 잘려진 부재들은 다양한 문양의 결을 만들어내며 다양한 개성을 띄고 있습니다.
동일성과 개성의 공존.
오랜세월 자라며 띠게 된 세로방향의 결대로 붙은 나무들끼리는 단단하게 굳어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마치 각기 달리 살아온 두 사람의 결이 인연이라는 접착제로 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형은 결혼은 포기한 거에요?”
목공방 원생 우진에게 새해 시작 처음으로 받은 질문이었습니다. 포기란 단어가 어쩐지 매스꺼웠습니다. 마흔의 나이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품는다는 것에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전제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나도 내가 좋은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데,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닐까봐 겁이나요.”
“에이. 그런게 어딨어요.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요? 또 편의점?“
우진의 표정을 살피려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작은 나무 조각 하나가 내 쪽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나는 별 일 아닌 듯 손으로 니트 소재의 옷을 훑어냅니다.
어떤 날은 내 위를 채우기 위한 식사가 아니라 마음을 채우기 위한 식사가 필요할 때가 있어요. 몸의 허기짐과 마음의 허기짐을 논리적으로 충분히 판단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러지 못한 거에요. 마음과 몸의 허기짐 사이에는 경계가 모호한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한 말보다 하지 않은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상대에게 의사를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점점 더 직설적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사는 동안’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떠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는 동안 그렇게 ’사라지고‘ 또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이 없는 빈 자리.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비어있던 마음에 더해진 결핍은 어떤 말로 수 표현하면 좋을까요. 더욱더 비어버린. 더 깊이 패여버린.
애초에 내것이 아니었던 무언가가 잠시 머무른 시간보다 아득히 먼 시간이 흐를 때까지도 선명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요. 이미 비워진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무른 것 같습니다.
껴안는 일. 손 잡는 일. 버티는 일. 지키는 일. 밥 먹는 일. 농담하는 일. 듣는 일. 돕는 일. 닮는 일. 자는 일. 믿는 일. 사는 일. 손목시계를 차는 일,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가지런히 놓아주는 일. 걷는 일. 혼자 눈물을 훔치는 일. 숨 쉬는 일.
나는 얼마나 행복해지고 싶어 그 모진 것들을 견디고 있는 걸까요.
늦은 오후 사람들에 섞여 풍경의 일부가 됩니다. 서점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일상에 내가 작은 조각으로 남는 상상을 합니다. 서점은 그런 공간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이 장소, 이 공간은 언젠가 당신과 함께 서 있던 자리입니다. 같은 장소에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을 다시 찾아가는 방법은 찾지 못했습니다.
목공방으로부터의 작은 조각 하나가 내가 특정한 자세를 취할 때마다 몸을 스칩니다. 통증이라는 단어를 스기에도 아주 작고 미미한 감촉. 하지만 유관으로는 식별이 어려운 그 작은 조각은 자신의 존재감을 적확하고 확실하게 표시하는데 성공합니다.